편집자주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박일근 논설위원이 살아 숨쉬는 우리 경제의 산업 현장과 부동산 시장을 직접 찾아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식량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WFP
데이비드 비즐리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이 최근 기자회견에서 한 경고다. 기후 변화와 코로나 팬데믹 영향에 그렇지 않아도 강세였던 국제 곡물 가격과 식료품 값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례 없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3월 식량가격지수는 전월(141.4) 대비 12.6% 상승한 159.3을 기록했다. 1996년 이후 최대 상승폭이다. 1년 전과 비교하면 무려 33.6%나 뛰었다. 특히 밀과 콩, 옥수수 등으로 구성된 곡물가격지수는 170.1까지 급등했다. WFP는 식품 가격이 1%포인트 오를 때마다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이 극빈층으로 추락하는 것으로 본다.
유엔 보고서는 더 암울하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17억 명이 식품과 에너지, 금융 중 하나 이상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개발도상국들이 한 올의 말총에 매달린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 놓여 있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위태롭고 재앙이 임박했다는 얘기다. 급기야 18일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도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주요 20개국과 글로벌 식량 위기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나섰다.
한 달 새 식품 물가가 30%나 뛴 스리랑카는 이미 지난 12일 채무 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고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화폐 가치가 90%나 폭락한 레바논에서도 밀 수입이 사실상 끊기며 빵값이 70%나 폭등했다. 이집트와 파키스탄, 아르헨티나, 페루, 쿠바 등에서도 연일 식품 물가 폭등과 식량난을 호소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한국인의 밥상도 타격을 받았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옛날국수 소면(900g) 가격은 1년 만에 2,600원에서 3,500원으로 33%나 뛰었다. 지난달 짜장면(9.1%) 라면(8.2%) 떡볶이(8.0%) 등 39개 외식 조사 품목의 물가는 모두 상승했다. 수입 밀 가격은 13년여 만에 톤당 400달러도 돌파했다. 1년 만에 40%나 올랐다. 농산물 가격이 물가를 밀어 올리는 '애그플레이션'이다.
전쟁터 된 빵공장, 밀 가격 폭등
국제 곡물 가격이 치솟은 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공장’이라고 불리는 곡창 지대다. 러시아도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이다. 두 나라가 전 세계 밀 공급량의 30%, 옥수수의 20%, 해바라기씨유의 80%를 담당한다. 그런데 전쟁이 나면서 수출이 막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의 98%가 통과하던 흑해를 차단했다. 수출용 곡물 3,000만 톤이 묶였다. 러시아도 서방의 경제 제재에 대한 보복 조치로 비우호국에 대한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앞으로도 문제다. 우크라이나 남동부 흑토는 전쟁터로 폐허가 됐고 농기계는 망가졌다. 농민들은 총을 들고 싸우느라 옥수수를 심어야 할 시기도 놓쳤다. 비료 값까지 폭등한 탓에 올해 곡물 생산량은 최악의 경우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밀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50% 이상 수입하는 나라는 36개국이나 된다. 특히 이집트는 곡물의 75%를, 레바논은 81%를 우크라이나에 의존하고 있다. 식량안보는 절박한 과제가 됐다.
기후변화와 코로나로 작년부터 강세
사실 국제 곡물가는 지난해도 높은 수준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이동제한 조치는 식량 생산과 가공, 유통을 마비시켰다. 곡물 수출을 제한한 국가는 30곳도 넘었다. 지난해에도 식량가격지수는 전년 대비 28.1%나 상승했다.
기후변화도 세계 식량 공급 체계를 흔들었다. 지난해 미국과 캐나다, 아르헨티나에선 가뭄과 고온 피해가 심했다. 미국 수확량은 최대 40% 줄었다. 대두, 설탕, 커피, 오렌지 수출 1위국인 브라질에서도 가뭄과 홍수가 반복됐다. 그나마 작황이 좋았던 호주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 세계 곡창지대가 이상 기온으로 몸살을 앓은 셈이다.
중국의 곡물 싹쓸이
최근 중국의 곡물 사재기도 국제 곡물가를 부추기고 있다. 농민군의 힘으로 정권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농업과 식량을 중시한다. 농촌 인구만 7억 명이 넘는다. 중국공산당이 매년 초 발표하는 1호 문건이 항상 농업 농촌 농민의 3농 문제를 다루는 이유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국인의 밥그릇은 중국 곡식으로 채워져야 하고 중국인의 손안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지난달에도 “식량 안보는 국가의 가장 큰일”이라며 “식량 문제를 국제시장에 의존해 해결되길 기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식량 수입 의존도는 20% 안팎이다. 그러나 대두 수입 비중은 80%도 넘는다. 주로 브라질과 미국에서 연간 1억 톤, 500억 달러 안팎을 수입한다. 중국의 콩 수입량은 전 세계 교역량의 60%를 차지할 정도다. 옥수수는 미국과 우크라이나에서 가져온다. 미국이 콩과 옥수수 수출을 막으면 중국은 치명타를 입는다. 중국엔 식량이 그야말로 안보 문제다. 더구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육류 소비도 늘고 있다. 1㎏의 고기를 얻기 위해선 3~13㎏의 사료를 먹어야만 한다. 곡물 수입량이 급증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비축량을 늘리고 있다. 옥수수 수입은 2019년 479만 톤에서 지난해 2,835만 톤으로, 밀 수입도 349만 톤에서 977만 톤으로 증가했다. 중국은 세계 최대 밀 소비국이기도 하다. 폭우 등 이상 기후로 작황이 좋지 않은 것도 변수다. 중국의 겨울 밀 수확량은 2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우려된다. 일각에선 올해 농작물 상황이 역대 최악이 될 수도 있다고 예상한다.
한국 밀 자급률 0.7%
우리나라도 식량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간 1,600만 톤 이상을 들여오는 한국은 세계 7대 곡물 수입국이다. 사료와 식품의 원료인 밀, 옥수수, 콩을 대부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식량 자급률은 밀이 0.7%, 옥수수는 3.5%, 대두는 26.7%에 불과했다. 2020년 식용 밀 수입량은 250만 톤까지 늘어, 쌀 소비량(350만 톤)을 추격할 정도다.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률은 90%를 넘었다. 그러나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고 밀 소비가 늘며 자급률은 급속도로 떨어졌다. 2020년 식량자급률은 45.8%, 사료를 포함한 곡물자급률은 20.2%로 추락했다. 2021년 식량안보지수는 세계 113개국 중 32위 수준이다.
정부는 국산 밀 비축 매입량을 확대하고 있다. 2020년 853톤에서 지난해 8,401톤, 올해는 1만4,000톤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사료와 식품 원료구매자금 금리도 0.5%포인트 인하했다. 그러나 근본책은 못 된다.
식량안보 위해 비축량 늘려야
식량안보 차원에서 자급률을 시급히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철호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 명예이사장은 “식량안보는 앞으로 점점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며 “먼저 정부와 민간의 곡물 비축량을 늘리는 데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뤄내고 농업 예산을 늘려 꾸준히 식량안보를 강화하는 게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주문했다. 이 이사장은 쌀이 남아돌지 않느냐는 지적엔 쌀이 전체 식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대까지 떨어진 점을 감안하면 착시라고 반박했다.
다만 너무 자급률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3년 ‘농업 농촌 식품산업 발전계획’을 통해 2017년까지 식량자급률 70%를 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공언에 그쳤다. 다시 '올해까지 식량자급률 55%'로 수정 목표를 내놨지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수표만 남발했다.
정보력 갖추고 식량 공급망 구축도
자급률을 올리는 게 힘든 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입 밀보다 국산 밀 가격은 3배나 비싸다. 밀 자급률을 높이는 건 그만큼 국민 세금이나 소비자 부담을 늘리는 셈이다.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밀을 수입한 뒤 국내산 밀 가격에 맞춰 시장에 내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국내 밀 재배 농가를 보호할 수 있고 자급률도 높일 수 있다. 이렇게 밀 자급률이 두 자릿수로 올라갔다. 우린 밀 수입을 전적으로 민간에 맡기고 있다.
김종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농업 여건상 무조건 자급률을 높이는 건 한계가 있다”며 “해외 농업 개발이나 수확 후 곡물 유통 과정에 진입하는 방식으로 안정적인 국제곡물조달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은 “미국과 캐나다에 이어 만약 호주까지 가뭄이 들면 우크라이나 사태보다 훨씬 심각한 글로벌 식량 대란이 벌어질 것”이라며 “현재 식량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과 줄어드는 경작지 문제와 기후변화 등을 함께 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남 소장은 “먹거리의 80%를 수입하는 우리가 제일 신경 써야 할 건 그 80%를 생산하는 나라의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이라며 “글로벌 곡물 메이저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정보력과 한국에 최적화한 글로벌 식량 공급망을 구축하는 게 숙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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