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결국 코로나 확산 사실을 밝히고 나섰지만 '최중대 비상사건'에 대처하는 방식에서는 여전히 '고난의 행군' 시기와 비슷한 서사(敍事)가 감지된다. 노동신문은 일심단결이나 정치사상적 위력을 강조하며 '방역대전'에서의 승리를 다그친다. 항일영웅의 후손들이 바이러스에 굴복할 리 없다는 '근자감'까지 과시한다. 철통같은 '우리식' 면역이 BA.1이건 BA.2건 오미크론 변이를 잡아낸다면 좋겠지만 보고된 사례는 없다. 결국 북한식 정치방역은 "우리가 백신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식이다.
이러다 보니 '건국 이후 대동란'을 극복하려는 해법 역시 극단적 봉쇄조치를 제외하고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수단이 별로 없다. 김정은 위원장과 당 중앙위 각 부서 일꾼들이 가정용 상비약품을 기부하고 있다고 선전하지만 팍스로비드를 상비약으로 갖고 있었을 리는 없다. 결국 꿀과 소금물, 버드나뭇잎 같은 민간처방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국제사회의 관여 방안이 시급하게 마련되지 않고는 북한에서 정치성 방역과 민간요법 위주 대응은 장기화할 것이고, 바이러스의 희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문제는 백신과 치료약 제공 등 외부 지원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다. 자립경제를 표방하는 북한이 외부로부터의 경제지원을 처음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홍수 피해가 컸던 1995년이었다. 외무성 산하에 '큰물피해위원회'를 창설해 조직적으로 원조 수용에 나섰다. 하지만 대북 지원에 참여하는 국제NGO들의 보편적 요구조건을 놓고 북한 당국과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옥스팜(Oxfam)처럼 국제적 명성이 높은 구호기구들이 대북사업을 접어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2004년부터 북한은 개발협력사업으로의 전환을 요구했고 '지원'이라는 표현에조차 거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의 드레스덴 선언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인도적 지원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반응은 싸늘했다. "남측의 불순한 목적에 순수한 인도적 협력사업이 농락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윤석열 정부가 북한의 코로나 상황이 공개된 직후 발빠르게 백신 지원의사를 밝혔지만 한미정상회담 등 정치적 불확실 요인이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윤석열-바이든 정상회담에서 최근 북한의 ICBM 발사를 비난하고 7차 핵실험 가능성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낸다면 북한의 반발을 살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북한에 백신 제공을 제안하는 현실적 방법 중의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2018년 평양정상회담 합의를 활용해보는 것이다. 9·19 평양공동선언에서 두 정상은 "전염성 질병의 유입 및 확산 방지를 위한 긴급조치를 비롯한 방역 및 보건의료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2조 4항). 두 달 뒤 장관급 회담에서는 전염병 대응체계 구축과 기술협력 등에도 합의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서명한 문서를 이행하는 방식이므로 북한이 이를 두고 지원인지 협력인지, 순수한 목적인지 불순한 의도인지 따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국내적 이득도 있다. 문재인 정부 당시 남북합의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 이어달리기와 같은, 대북정책의 지속성 존중 의지를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선택은 여전히 북한 측에 달려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비상사태 속에서 방역 진두지휘에 나선 김정은 위원장이 결단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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