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바닥에 매어 살아간다.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든. 평생 집안일만 하다가 죽어서야 해방된 삼 남매의 엄마 혜숙처럼. 최근 종영한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 외곽에 사는 삼 남매 기정, 창희, 미정의 집을 중심으로 등장 인물들 각자가 벗어나기 힘든 자신의 실존적 삶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혹은 그것을 살아내고자 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로 극적 몰입감을 고조시켰던 이 드라마는 마지막 회에서 '환대'라는 단어와 함께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질문을 던지며 종영했다. 구씨에게 '나를 추앙해요'라고 미정이 말한 순간에 미정의 삶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사랑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삶의 허기, 존재의 결핍은 추앙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추앙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적당한 상대를 만나 썸을 타다 연애하고, 결혼으로 골인하는 것이 이른바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다. 혹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내 마음대로 타인을 '고치려' 하다가 관계가 끝나기도 한다. 삶의 여느 사건들처럼 살면서 몇 번 겪게 되는 별것 아닌 사랑은 우리의 실존적 결핍을 결코 채우지 못한다.
만일 추앙이 '무조건 떠받들라'는 의미였다면 많은 이들은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자아를 비워 자신의 욕망을 채워 넣는 폭력이니까. 대신 이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는 이 드라마에서 '환대'로 나아간다.
직장 상사는 미정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전 남자친구는 돈을 빌려놓고 적반하장이다. 미정은 이를 가족에게도 숨겨야 한다. 그는 자신보다 더 밑바닥 인생을 사는 듯한 구씨에게 다가간다. 도움의 손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추앙하라고 말한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구씨는 한없이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다. 이름조차 감춰진 그는 알코올중독에 빠질 만큼 절망적이다. 절박한 폭력일 수도 있었던 자신을 추앙하라는 비명에 구씨는 자신의 절망 안에서 응답했다.
구씨 조직의 보스마저 그에게 알코올중독 치료를 종용할 때, 미정은 그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회적으로 치명적인 낙인 중 하나인 호스트바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미정은 그저 들을 뿐이다. 구씨에 대한 미정의 추앙은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구씨를 변화시킨다. 구씨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낯선 아이를 어색하지만 설레는 눈길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배신한 형에게 "형, 환대할게. 환대할 거니까 살아서 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불가해하고 고통스러운 얼굴 앞에 멈춰설 수밖에 없는 주체의 '환대(hospitality)'를 말하지만, '나의 해방일지'의 환대는 오히려 자신을 추앙하라는 비명과도 같은 요구에서 시작된 취약한 존재들 사이에서 구성된다. 각자의 바닥을 겪고 있는 존재들이 추앙이라는 관계 속에서 서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환대는 이들을 각자의 실존적 결핍에서 해방한다. 환대로 나아간 이들의 관계는 타인을 걱정할 수 있는 '여유'에서 나온 게 아니라, 각자의 절망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해방일지'는 취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의 절망이 연결될 때, 비로소 어떤 형태의 '환대'가 가능하다는 '어둠 속의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