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늘 책을 보셨다.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엄마는 매일 붉은 네모 칸들이 질서정연하게 그려진 원고지 묶음을 앞에 두고 펜으로 글을 썼다. 그런 엄마의 영향이었을까 초등학교 때부터 학창 시절 내내 나는 문예반이었고, 문학상 수상작들을 읽으며 어설픈 수준이긴 하지만 시를 끄적이곤 하던, 나름 문학소녀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이후 어느 시점부터 꽤 오랫동안 꿈을 잊고 살았다. 해내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는 현실에 적응하면서, 목전에 닥친 당면과제들을 잘 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이 들면서 서서히 '꿈' 따위는 잊고 살았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삶은 십대 때보다 더 치열해졌다. 방황하던 시기들도 있었지만, 주어진 현실 안에서 내가 다다를 수 있는 최상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주, 월, 분기별 하위 목표들을 설정해 스스로 채찍질하며 열심히 살았다. 과연 이루어지긴 할지 알 수 없는 미래의 목표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고달프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크고 작은 시련 속에서도 꾸역꾸역 삶의 목표들을 하나하나 달성했다. 마침내 이른바 4대 보험 가입이 되는 월급쟁이로서의 안정된 삶이 시작되자, 스멀스멀 '딴짓'을 하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일'이 아닌, '다른 짓'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얻고 싶은 열망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흔이 되어서야 테니스와 요가를 배우기 시작했고, 독서토론 모임을 만들어 인문 고전도 양껏 탐독했다. 아들 딸과 함께 수영장도 다니고, 주말이면 남편까지 뭉쳐 네 식구가 다 같이 산에 오르며 비로소 삶의 소소한 기쁨을 알아갔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나의 '딴짓'은 더욱 다양해졌는데, 시즌마다 발레, 오페라, 뮤지컬 공연을 보러 다녔고, 유명한 화가의 작품 전시회를 다니는 호사도 누렸다. 현실적 목표에 집중하느라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예술과 문화에 대한 오랜 갈증이 해소되는 기쁨은 일에서 얻는 만족과는 또 다른 행복감을 주었다.
요즘 미디어를 통해 유명인들의 '본캐', '부캐'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는 우리가 의식하는 현실 속 자아(ego)가 주도하는 삶이 '1호 인격의 삶'이라면 무의식 차원의 본연의 자기(self)가 이끄는 삶은 '2호 인격의 삶'이라고 한 정신의학자 융의 학설과 잘 맞는다. 그에 따르면, 나의 '딴짓'은 그전까지 '본캐'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나의 '부캐'가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융은 발달한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호 인격의 삶과 2호 인격의 삶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는데, '워라밸'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이미 백 년 전에 알고 있었던 셈이다.
21세기의 현대 긍정심리학자들도 일에서 벗어나 있는 여가에 자신이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가만히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가진 본래의 성격 특질을 엿볼 수 있는 틈이며, 자기 본성에 맞는 즐거운 활동을 자주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에 다다르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하지 말라던 '딴짓'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면, 어른이 된 지금 가끔 '본캐'는 내려두고 '부캐'가 원하는 '딴짓'을 맘껏 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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