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라는 저서에서 "매체가 진짜 메시지다"라고 주장했다. 보통 TV나 신문 같은 매체는 도구일 뿐이고 그 매체가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거기 담겨 전달되는 내용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진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담긴 내용보다 매체의 형식 자체라는 것이다. 맥루한에 따르면 매체의 가치가 거기 담겨진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각은, 마치 총기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그 총기를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그 가치를 결정한다는 주장처럼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고성능 반자동 소총의 진짜 메시지는 누가 그걸로 누구를 죽이느냐가 아니라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순식간에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총기 자체인 것처럼, 새로운 매체의 진짜 메시지도 그 매체가 사람들의 행위와 상호작용의 규모와 형태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달려 있다.
지난달 한국의 '심심한 사과' 논란을 보면서 맥루한의 이 명제를 떠올린 게 나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나는 '심심한'이라는 표현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나도 어릴 때 신문에서 이 표현을 보고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이 논란에서 정작 내 관심을 끈 것은 트위터에서 낯선 표현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해 10초 정도 시간을 들여 검색해 보기보다는 자기 편의로 해석해 바로 분노의 댓글들을 달았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 신문에서 같은 표현을 보고 어리둥절한 나의 첫 대응은 길거리에 뛰쳐나가 왜 사과를 심심하게 해서 국민을 우롱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고, 옆에 있던 아버지에게 조용히 그 뜻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물론 분노의 댓글을 단 사람들이 나보다 인내심이 없거나 성격이 공격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종이신문과 SNS라는 매체의 형식이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SNS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짧은 메시지들을 손바닥만 한 화면에서 빠른 속도로 넘겨 보며 어떤 메시지에 '좋아요'를 누르고, 어떤 것을 공유하고, 무엇에 짧은 댓글을 달지 결정하도록 강요받는다. 짧은 메시지를 곱씹어 보거나 그 너머의 좀 더 자세한 배경 정보를 찾거나 하기 위해 뜸을 들이면, 그 메시지는 이미 '어제 뉴스'가 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좋음과 싫음의 이분법으로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세상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공간에 내던진다. 당연히 그 판단의 기준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편견이고, 이렇게 확증 편향은 SNS 시대의 작동 매뉴얼이 된다.
최근 미국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의하면, 미국 10대의 46%가 인터넷 서비스를 "거의 끊임없이" 사용하고 48%는 최소 하루에 여러 번 사용한다고 한다. 또 다섯 중 하나는 유튜브를 "거의 끊임없이" 사용한다고 한다. 불행히도 우리 집 10대를 보면 틀리지 않은 통계치다. 맥루한은 새로운 기술은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감각의 비율과 유형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바꾸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유형의 정보 범람은 쉽게 정신 붕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했다. 60년 전 종이책에 실린 선견지명을 10대 아이에게 전달하려면 3분짜리 유튜브 동영상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하지만 매체가 메시지라고 했으니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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