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사이트에 날짜 계산하는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자신의 생년월일을 입력하면 오늘까지 며칠째 살고 있는지를 숫자로 정확하게 알려 준다. 그 날짜를 숫자로 확인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3만6,500일, 즉 100년을 살다 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보면, 나는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진지 오래되었다. 드라마나 연극에서 '비극(悲劇)'은 주인공이 파멸, 패배, 죽음 등으로 결말을 맺는 형식으로, 주인공이 극의 중심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인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반드시 인생이란 무대에서 내려가야만 하는 '비극적 결말'을 전제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각기 다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내고, 인생의 무대에서 퇴장할 것인가라는 것이 우리 삶의 최대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동양의 고전인 '대학'에 은나라 성군인 탕왕이 자신의 세숫대야에 새겨 놓은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란 말이 있다. 해석하면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로워졌으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한다"이다. 이 말은 대학교 신입생 때인 '한문개론' 시간에 처음 배웠고, 그 후 고전 공부하면서도 많이 접했지만, '좋은 말이네!'라며 무심히 지나갔다. 하지만 50대에 접어들었던 어느 날 '일신(日新)'이란 이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고, 살아갈수록 '오늘'이라는 그 무게감이 날로 더해 가는 것 같다. 아마도 탕왕이 자신의 세숫대야에 새겨 놓고, 매일 아침 세수를 하면서 그 문장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던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어느 누구도 살아본 경험이 있는 '오늘'을 사는 사람은 없다. 맞이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각자의 인생에서 '오늘'이란 이 장면은 언제나 처음 맞이하는 순간이다. 어제의 오늘은 오늘의 이 순간이 아니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지나간 과거의 시간일 뿐이다. 오늘 이 순간은 우리 인생에서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고,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 경험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어설프고 불안하고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도 그 시간의 흐름 속에 있기에 언제나 변화하고,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기에 '삶의 완성'이란 것은 살아있는 동안은 있을 수가 없다.
삶에 있어서 '완성'이란 것은 시간의 종결을 의미하기에 어제까지의 나의 삶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을 맞이하는 이 순간은 다시금 선택의 순간에 서지 않을 수가 없기에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그 순간의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 방향과 그 삶의 의미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인생의 최고 목표라 할 수 있는 '사람다움의 실현', 즉 인격 완성을 위하여 신중하게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하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인생을 살다 보면, 늘 말실수를 할 수 있고, 잘못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덜 성숙된 인간의 모습이다. 성숙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반성하는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오늘'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것인지가 우리 모두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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