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기간이다. 가르치는 과목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것이라 이 과목은 중간고사 시험 대신에 다큐멘터리를 분석하는 과제를 내준다. 요즘 학생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좋은 작품을 학생들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신중하게 다큐멘터리를 고르려고 한다. 사진 한 장이 백 마디의 말보다 많은 의미를 전달해주는 것처럼, 좋은 다큐멘터리는 값진 사유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종강하면 '좋은 수업을 들었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한다. 지난주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다가 지난 2016년 개봉했던 김정근 감독의 '그림자들의 섬'이란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다큐멘터리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진관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노동자들의 겸연쩍어 하는 얼굴로 시작되는데, 한진중공업 노조의 30년 노동운동을 기록한 영화였다. 1982년 입사한 박성호씨, 1985년 입사한 윤국성씨 그리고 1981년 입사한 김진숙씨 등 한진중공업의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이들이 주요 인터뷰이(interviewee)로 출연한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는 어떠한 현란한 편집 기술도 없이, 웅장한 음악도 없이 인터뷰와 자료 영상만으로 1시간 40분을 채운다. 웹에서 소비되는 인터랙티브 다큐멘터리나 가상현실을 통해서 서사를 전개하는 VR 다큐멘터리가 나오는 시대에 인터뷰가 주를 이루고 있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보는 내내 가슴이 무거웠다. 한국의 민주화가 그냥 얻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의 노동 현장이 만들어지기까지 처절한 삶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무게만큼 가슴에 전해지는 묵직한 무엇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을 학생들에게 분석하라고 할 수 없었다. 지난 한국 사회의 노동사가 아프게 전달됐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노동환경이 전혀 나아지고 있지 않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지난 15일, 평택의 SPC 계열 제빵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일에는 대우해양조선 옥포조선소에서 60대 남성 노동자가 지게차에 끼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원주 폐기물 선별장에서 60대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겠다고 만들어진 법이 중대재해처벌법이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사망이 많았다는 뜻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난 1월부터 노동 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 수는 446명에 이른다. 그런데 기소된 건수가 겨우 1건이다. 그것도 첫 기소였다. 그런데 그나마도 기소된 기업의 대표가 처벌을 받을지는 미지수다. 기업 변론을 맡은 로펌이 법이 모호하고 처벌이 과하다는 이유를 들며 법원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에서 김진숙씨는 맨 마지막 인터뷰에서 조합원들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떤 마음으로 싸웠는지, 어떤 마음으로 울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묻었는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우리도 그랬으면 싶다. 노동자들이 사망할 때마다 기업과 나라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기억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 마음이 어땠는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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