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효···." 이른 아침 백화점 앞길을 쓸던 아저씨가 끝없는 청솟거리에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겨울의 시작, 11월이면 여름을 시작하는 남미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그리워지는 날씨였다. 땅 아래를 계속 파 들어가 뜨거운 지구 핵도 통과해 반대편으로 뚫고 나가면 만날 거라 상상했던 나라, 아르헨티나. 시차도 딱 정반대 12시간이니 아르헨티나가 오전 9시 근무를 시작하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오후 9시 저녁뉴스를 보고 있다.
거리의 꽃나무는 온통 신비로운 보라색이었다. 하얀 팝콘처럼 팡팡 터지는 벚꽃만 알고 있었는데, 11월에 피어나는 지구 남반구의 꽃나무 하칸다라는 세상 온갖 종류의 보라색이었다. 좋은(Buenos) 공기(Aires)라는 이름처럼 달콤한 바람으로 가득 찬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플로리다 거리에서는 거리 예술가들이 '땅고'(tango·탱고)를 추고 있었고, 성악가들의 꿈의 무대라는 콜론극장도 나타났다. 중심도로에 높다란 오벨리스크도 세워져 있으니, 남미의 파리를 꿈꾸며 이태리 대리석 몇 장과 소 한 마리를 기꺼이 바꾸던 흥성스러운 시절도 그려졌다. 그러고는 영화 '에비타'의 실제 주인공 에바 페론이 테라스에서 손을 흔들던 장면을 떠올리며 대통령궁에 닿았다. 가장 커다란 결정권을 가졌기에 가장 큰 항의의 목소리로 모여드는 곳. 바로 앞 '오월 광장'에는 흰색 머릿수건이 그려져 있었다.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도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비델라는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더러운 전쟁'이라 불리는 잔혹한 공포정치를 펼친다. 하나둘 흔적도 없이 정권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사라졌고, 실종자의 아이들을 유괴하고 강제 입양해 뿌리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바닷속에 수장되었다는 소문만 파다한 청년들이 수만 명이었다.
이 잔인한 시절에도 자식을 지키려는 어머니들은 용감했다. 1977년 실종된 자식의 이름과 태어난 날짜를 새긴 하얀 기저귀천을 머리에 두르고 처음 광장에 모여 선 14명의 어머니들. 검은 숄을 두르고 가만히 애도하는 것을 거부하는 상징이었다. 이후 목요일마다 실종의 진실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는 어머니들의 행진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전, 두 명의 아들과 며느리를 잃고 거리로 나섰던 '오월 광장 어머니회' 창립멤버 에베 데 보나피니는 93세의 나이로 먼저 간 자식들을 따라갔다.
우리와는 모든 게 180도 달랐던 아르헨티나였지만, 애가 타고 원통해 가슴을 퍽퍽 치게 되는 부모의 아픔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45년간 끝내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던 아르헨티나의 청년이든, 주체할 수 없이 몰려드는 군중 속에 갇혀 숨이 막혀간 우리 아이든, 자식을 잃은 고통을 누가 감히 조용히 참고 견디라 말할 수 있을까?
아르헨티나 출신인 프란체스코 교황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가르쳐준 할머니의 유언장을 책갈피로 삼아 꺼내 본다고 한다. 할머니를 따라 "말은 거의 없어도 할 말은 알며, 천천히 걸어도 멀리 간다"는 구절도 자주 암송한다. 결코 혼자이지 않음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 서로 의지하며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것은 우리 사회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이 아닐까. 45년 동안 천천히 멀리 걸어간 흰색 머릿수건의 아르헨티나 할머니들처럼, 낮지만 단호하게 말해본다. 잊지 않고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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