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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안전에 필요한 아이템

입력
2022.12.19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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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뉴시스

연합뉴스, 뉴시스

겨울철 배달할 때 신을 방한화를 구입하기 위해 인터넷을 한참 뒤졌다. 한파에 일반운동화를 신고 다녔다간 발끝이 시릴 뿐만 아니라 비나 땀에 양말이 젖기라도 하면 동상에 걸리기 십상이다. 브랜드 방한화 가격은 10만 원을 훌쩍 넘겨 부담이었고, 가성비가 좋다는 신발은 성능이 의심됐다. 배달 초보 때 사 놓은 싸구려 방한부츠는 계단을 뛰어다니기엔 너무 무거워 신발장 구석에 처박아 놓은 터였다. 비싸더라도 검증된 제품을 사 오래 신는 게 합리적이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2만9,900원의 가격표와 수많은 리뷰가 달린 제품을 보자 나도 모르게 '주문' 창을 터치했다.

추위에 고통스러운 건 발가락만이 아니다. 오토바이 핸들에 토시를 달아 손을 보호해야 하는데, 여유만 있다면 핸들에 열선을 달 수 있다. 내복을 입어도 무릎 시린 건 참기 어려운데, 무릎을 덮는 담요 형태의 워머나 방한용 무릎보호대를 구입하면 그나마 낫다. 귀와 볼을 따뜻하게 감쌀 넥워머, 체온을 보호할 발열조끼, 성능 좋은 패딩 등 한파에도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아이템은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라이더들은 겨울 배달은 아이템발이라고 말한다. 게임에서 '현질'(현금을 지름) 여부에 따라 아이템의 질이 달라지듯 경제적 처지에 따라 배달노동자 보호 장구의 질도 달라진다.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노동법이라는 일률적 규범을 만들었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32조는 사업주가 영하 18도 이하의 급냉동어창에서 하역작업을 하는 노동자에게 '방한모·방한복·방한화·방한장갑'을 지급하도록 했다. 근로자에게도 보호구 착용의무를 부과했는데, 산업안전 문제를 개인선택에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런 노동법의 한계는 산업안전 예산이 풍부한 대기업과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 간 차이였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다. 지금은 문제가 한층 복잡하다. 영하의 날씨에 일하는 배달 노동자에게도 안전보건규칙을 확대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법적용 자체가 불가능하다. 배달노동자뿐만 아니라 노동법 바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작업도구 역시 개별 노동자의 자산과 소득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노트북, 카메라, 의자까지 모두 개인이 비용을 책임진다. 어떤 기업에 입사하는지에 따라 노동조건이 달라지는 것을 넘어, 개별 노동자의 자산 소득에 따라 노동조건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이다.

최근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에서 '공정한 노동시장, 자유롭고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권고문을 발표했다. 1953년 제정된 낡은 노동법과 기존 노동조합으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인구구조 변화, 기술혁명과 경제구조변화 속에 놓인 노동자를 보호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근로기준법을 고쳐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하고 노조법 개정으로 노조 밖 노동자에게 노동3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기대하고 권고문을 읽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연장근로 확대와 노동시간 유연화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정부 여당은 기다렸다는 듯 권고문을 토대로 노동개혁을 하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낡은 노동법이 아니라 중요한 노동문제를 일부 어용교수와 노조혐오를 이용하여 정권보호의 땔감으로 쓰는 낡은 보수가 아닐까. 노조 밖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노조와 노동법이라는 검증된 보호구이지 허위리뷰와 광고만 요란한 정치선동이 아니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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