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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한 명동 구도심에 울리는 성탄 종소리

입력
2022.12.21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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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내가 중학생일 무렵 직장인이었던 큰누나는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명동성당에서 열린 해바라기 콘서트를 관람시켜 주었다. 해바라기는 '사랑으로'라는 곡으로 1980년대 인기를 누리던 듀엣 포크송 가수였다. 울림이 좋은 명동성당 내부에서 따뜻한 하모니의 선율을 즐기고 형제들은 인근 경양식집에서 저녁을 즐겼다. 1986년 크리스마스의 추억이다.

명동은 조선시대 명나라 사신들이 머물던 곳에서 유래한다. 유학사상을 건국이념으로 했던 조선은 명나라와의 외교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이유로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졌어도 조선시대 내내 그 지역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명동의 중심엔 지금도 중국대사관이 위치한다.

명동의 옛 형상은 을지로 방향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지류를 따라 형성되어 왔다. 물길을 따라 사이사이로 군락이 형성되어서 불규칙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경 긴자를 모델로 삼아 변화한다. 간척사업을 통해 형성된 긴자의 평평한 대지는 도로의 체계와 블록 형태를 계획적으로 조성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의 규격인 다다미는 그 한 칸이 사람이 누웠을 때의 크기에 비례한다. 이 비율은 건물의 모듈을 체계화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일본 건축물의 특징은 앞면 폭이 좁은 대신, 깊이가 깊은 형태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중심 거리는 일본의 건축·문화적 이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명동 거리의 볼륨과 사각으로 나누어진 블록들, 그리고 충무로 메인스트리트는 당시 본정통이라 불리는 중앙로로 기획되었다. 미츠코시 백화점이 현 신세계 본점 자리에 위치했으며 원구단을 중심으로 호텔과 백화점 상가가 형성되었다. 해방 후 재건사업으로 경제발전을 이룬 대한민국의 명동은 은행업의 중심지구가 됐다. 명동에서 "사장님!" 하고 소리치면 길 가던 신사들이 뒤돌아 봤을 정도였다. 경제중심은 문화중심과 연결되어서 패션과 미용의 중심지로 각광받으며 미스코리아 배출의 메카로 자리한다. 국내 최초 패션학원이 세워지고 고(故) 앙드레김은 2회 졸업생이 되었다. 명동의 전성기는 경제의 중심, 패션과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발현된 것이었다. 이렇듯 전성기를 누리던 명동이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금융기관이 여의도로 이전하였고 학교가 이전하면서 주거인구가 사라졌다. 패션의 중심으로 자리했던 명동이었지만 청담동, 강남에 주도권을 넘겨준다. 코로나19 직전 명동의 풍경은 중국과 일본 관광객 일색의 문화로 채워졌었다. 버스를 타고 온 관광객들이 화장품이나 소위 'K컬처'라는 문화를 체험하는 장소로 변했다. 이때 내국인들은 명동으로의 발길을 끊기 시작했다. 외국인 대상 낮은 퀄리티의 비싼 상품들은 내국인의 외면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걷기 좋은 산책로이거나 이색적인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이벤트 공간도 부족하였다. 노점상이 즐비한 그저 그런 동네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우리 구도심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 준다.

도시의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는가? 핵심은 사람과 콘텐츠에서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신도시 무한 확장에 혈안 되어 있다. 이는 구도심을 해체시킨다. 대한민국엔 집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빈집이 늘어간다. 도시의 원형을 회복하고 구도심 개선으로 시선을 돌려야 마땅하다. 명동성당의 종소리를 추억하는 성탄을 기대한다.


김대석 건축출판사 상상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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