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쓰면서 김훈 작가가 '꽃이'와 '꽃은' 사이에서 고민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작가의 선택은 보다시피 '꽃이'였는데 그 이유를 그는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에서 이렇게 말한다.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거기에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라고. 그렇다면 작가는 이 문장에서 사실의 세계를 진술하고자 했던 것일 터. 작가의 의견에 공감하면서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이미 '버려진 섬'과 '꽃'이 시각적으로 대조를 이루는데 대조, 강조 기능의 보조사 '은'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절제해서 주격 조사 '이'를 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최종회, 마지막 장면에서 앤은 오랜 앙숙이었던 길버트와 화해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자신의 2층 다락방 창문을 열고는 행복감에 겨워 이렇게 읊는다. "하느님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온하도다." 이 구절은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피파의 노래'의 마지막 두 행인데 원문은 이렇다.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그런데 이 구절을 이렇게도 번역한다. "하느님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평온하도다." 그러나 대등 연결 어미 '고'를 통해 두 문장을 병치하는 것만으로도 인과관계의 자연 수로가 잘 흐르는데 굳이 종속 연결 어미 '니'를 써서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한 인공 수로를 뚫는 격이지 않을까? 설명을 절제한 처음 번역이 더 담백해 보인다.
이렇듯 글쓰기에는 절제가 중요한 주제인 것 같다. 글쓰기에서 절제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언급은 무척 많다.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는 주인공에게 친구인 국문학과생이 연애편지 쓰는 법을 조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감탄사와 느낌표 그리고 말없음표는 색깔로 치면 보라색쯤 될까. 너무 자주 쓰면 천박해 보이지", "은유법이나 의인법의 남발은 산문을 어색하게 만드는 지름길이지" 등의 말이 이어진다. 영국의 문필가 C. S. 루이스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소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매우' 정도의 의미라면 '무한히'라고 하지 말아라. 정말로 무한한 일을 이야기할 때 쓸 단어가 없단다"라는 구절이 있다.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부사를 자제하되 특히 대화 설명에서 부사를 사용하는 것은 피하라고 충고한다.
가히 절제의 미학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절제는 미학임과 동시에 미덕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스벤 브링크만은 '절제의 기술'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절제를 다른 모든 덕을 익히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덕으로 보았음을 지적하면서 온갖 선택지와 유혹이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절제의 기술은 유혹의 시대를 이기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나아가 이제 절제는 미학과 미덕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 아닐까. 환경 파괴에 의한 이상 기후 현상은 이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고 기후 현상보다 기후 재앙이 더 적합한 말이 되었으며 해가 갈수록 빈도와 강도는 늘어나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이 인류의 절제되지 못한 욕망 추구에 있다는 데는 별 이의가 없을 듯하다. 또 새해를 맞으며 인류의 생존 조건이자 지구 문명의 존속 조건이 되어버린 '오래된 미덕' 절제의 의미를 반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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