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책보다 영상물의 시대라고는 해도 막상 사람들이 글자를 보는 시간은 더 늘었다. 물론 메신저로 얘기를 나누거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은 엄밀히 보자면 글말이라기보다는 입말을 글로 옮긴 것이라서 독서와 견주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들 여전히 게시판이나 SNS에서 수많은 글을 읽으면서 정보를 주고받으며, 영상물을 보고 나면 댓글을 비롯한 여러 방식으로 의사소통도 한다. 그런 교류를 할 때는 누구나 적확한 문장을 구사하기를 원한다. 꼭 책을 내거나 기성 언론에 기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예전보다 글로써 스스로를 드러내고 남을 이해해야 할 때가 더욱 늘었다.
그래서 오히려 정보나 글의 공해라고까지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비판도 일견 일리가 있으나, 누구나 표현과 소통을 향한 갈망이 있으며 그것이 세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소수가 언어를 독점하는 시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변화된 시대에 맞게 말과 글을 어떻게 함께 가꾸느냐가 더 중요하다.
많이들 얘기하듯이 한국은 매우 높은 교육 수준에 비해 글이든 말이든 자국어를 잘 사용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다. 한국어를 외국어로 옮기는 번역가들이 특히 많이 느끼는데, 꼭 언어의 유형론적 차이 탓만이라기보다는 두서없는 문장이나 어설픈 어휘 선택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이다. 번역할 대상이라면 인터넷에 편하게 되는 대로 올리는 글보다는 여러 면에서 나아야 할 텐데도 그렇다.
교육 수준과 견준다면 뜻밖이겠으나, 교육 내용을 비춰 보면 당연한 결과다. 지금이야 우리나라도 좀 나아졌다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말하기와 글쓰기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기존 지식의 습득이 급선무였고, 그걸 스스로 어떻게 언어로 드러내느냐는 부차적이었다. 게다가 훈민정음 창제 후에도 글말은 주로 한문이었듯 한국어는 온전한 언어 노릇을 한 역사가 짧고, 현대에는 영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쓰인 지식을 따라가느라 바빠서 그런 주요 세계어보다 뭔가 매우 모자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위 언어들도 원래는 초라했다. 예컨대 프랑스어는 라틴어보다 못했고, 영어는 프랑스어보다 못했는데, 다들 갈고닦음을 거쳤다. 언어는 얼마나 가꾸고 잘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 사이에 내재적인 우열이 없다는 방증이다.
다른 나라보다 한국 사람이 외국어를 못한다고 단정 짓긴 힘들지만 많은 한국인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면 실은 모어를 썩 잘하지 못하기 때문도 아닐까 싶다. 모어 솜씨부터 가다듬지 않은 채 외국어를 발라봐야 똑바로 못 붙고 쉬이 떨어진다. 그래서 글쓰기를 배우는 이가 늘고 문해력에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은 바람직하다. 한국어 화자가 이제 언어 문제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증표일 것이다. 연중행사로 겨레말과 나라말을 지키자고 추상적인 목소리를 드높이기보다는 글재주와 말재주가 훌륭한 개인이 늘면 한국어라는 개별 언어 체계도 야무지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누구나 글을 쓰고, 더 잘 쓰려는 이 시대를 반길 만하다.
이제 어떤 소재를 던져 주면 인공지능이 글도 쓴다. 아직 여러모로 개선의 여지가 있으나 기술 발전이 워낙 빠르니 놀랄 일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 미래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든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소통할 의지가 있다면 글쓰기라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는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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