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나 영웅 서사를 들여다보면 위험에 빠진 공주를 구해내는 용사의 이야기들이 빈번히 등장하곤 한다. 아마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이야기' 역시 유사한 형식의 이야기다. 용사가 바다의 괴물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다.
이 원형 구조는 현대의 영웅 서사를 창작할 때에도 활용된다. 영웅은 공주를 구하기 위한 부름을 받고 그에 응답해 여정을 떠나게 되고, 이때의 주인공은 평범한 일상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신비의 땅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위험과 도전으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에서 온갖 시련과 역경에 직면하게 된다. 역경을 극복하고 악을 물리친 영웅은 성배를 획득해 귀환한다.
사실 이러한 영웅 서사는 창작된 이야기 속의 영웅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해당된다. 영웅이 여정을 떠날 때 작가는 영웅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떠나고, 온갖 시련과 역경을 극복해 낸 다음 성 안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용을 찾아내 무찔러내야 한다. 이야기와 함께 작가 역시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다만 차이점은 이야기 안에 용이 형상화된 존재라면, 작가에게 용은 자신이 들여다보기 싫어 외면한 심연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그것을 직면하고 무찔러 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 이야기의 출발점과 결말을 깨닫게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용을 무찌르고 성배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다.
목표 지점을 설정해 맹렬하게 달려가다가 용을 물리쳤을 때의 열기와 성취감은 그 어느 곳에서도 다시 얻을 수 없다. 영웅이 다시 마을로 돌아가 지난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직면했을 때 그는 어떤 것을 목표로 두고 삶을 살아야 할까? 과거의 영광을 곱씹으며 살게 되는 건 아닐까. 구출해 낸 공주와는 정말 생활에 지치지도, 질리지도 않고 그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걸까?
나는 어느 순간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맹목적으로 달려와 영화 한 편을 찍었더니 이제 내 눈앞의 용은 사라졌고, 더 이상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좋을지 모르겠는 막막함과 만약 또다시 임무를 부여받더라도 내가 다시 이 고통과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아득함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째서 누구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의 이후에 일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걸까. 어쩌면 지난하게 반복되는, 기록할 것 없는 일상이라 치부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나는 이 지난한 일상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여정을 떠날 힘을 얻었다. 이번에도 분명 시련과 고난이 그리고 적대자가 내가 가는 길을 막아 세울 것이다. 그러나 삶과 맞닿아 있는 우리의 이 이야기에는 조력자가 등장해 우리를 도와줄 것이며, 또 스스로도 믿지 못할 지력과 힘도 숨겨 놓았다. 나는 다시 여정을 떠나지만, 언젠가 이러한 여정이 몇 차례 반복되고 머물러 있어도 행복할 방도를 찾게 된다면, 그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후의 삶이 어떻게 펼쳐지게 되는지 이야기해주겠다. 먼저 알게 된 분이 있다면 우리가 이후의 이야기를 함께 찾아가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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