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한 선배 변호사는 자신이 대표인 로펌에서 실무 수습하는 예비법률가들에게 여성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으라는 조언을 하신다. 직접 여쭤보지 않아 정확한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좋은 법률가가 되려면 여성 작가의 소설에 나타나는 섬세한 언어 감각, 사회의 허위의식과 모순을 꿰뚫어 보는 세밀한 감수성 같은 것들을 배우라는 뜻이 아닐까 짐작한다. 20년 차에 가까운 '고물' 변호사라 이제 이 조언을 따른들 좋은 법률가가 되기는 기대난망이지만 그래도 이 조언을 떠올릴 때마다 여성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어보려 하게 된다. 새해를 맞아 무슨 책을 읽을까 하다 이 조언이 떠올랐고 그래서 고른 것이 미우라 아야코와 박완서의 글이었다.
작년이 탄생 100주년이었던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소설 '빙점'으로 잘 알려진 일본 작가인데, 국내에 가장 많은 문학작품이 번역된 일본 작가라는 점은 그만큼 알려진 것 같지 않다. 146편이 번역·출간되었다는데 2005년 통계이긴 하지만, 그때까지 110편이 번역·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를 훌쩍 앞선다. 그리고 박완서 선생은 더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이다.
얼핏 별 관련 없어 보이는 두 분의 소설을 읽고 개인사를 알아가면서 두 분에게 주목할 만한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전쟁이 인생의 향방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박완서는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그해 일어난 한국전쟁 때문에 학업의 길을 중단했다. 미우라 아야코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을 계기로 군국주의 교육의 허구성을 깨닫고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둘째, 전업주부로 살다가 마흔 언저리에 늦깎이로 언론사 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문단에 본격 등장했다는 점이다. 미우라 아야코는 42세인 1964년 아사히신문 소설 공모에 '빙점'이, 박완서는 39세인 1970년 여성동아 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었다. 셋째는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작품에 깊숙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미우라 아야코는 투병 중이던 30세 때 세례를 받고 개신교인이 되었고 박완서는 50대에 가톨릭교회에서 영세를 받았다. 넷째, 무엇보다 두 분의 글쓰기가 큰 고통 가운데 이뤄졌다는 점이다. 미우라 아야코는 20대에 당시 불치병이던 폐결핵에 걸렸고 척추 카리에스(결핵성 척수염)까지 함께 발병하여 13년간 병원에서 요양했으며 말년에는 직장암과 파킨슨병에 시달리는 등 평생을 병고와 싸워야 했다. 박완서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각별한 사이였던 오빠를 잃었고, 남편과 사별하는 아픔과 장성한 20대 외아들을 여의는 '참척'의 고통을 한 해에 같이 겪기도 했다.
박완서는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아들 잃은 고통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내는데 그 참척의 일기 서문에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미우라 아야코의 유언 중에도 '질병은 나에게서 건강밖에 빼앗아가지 못했습니다'라는 담담한 고백이 있다. '한 말씀만 하소서' 편집자는 책 말미 해설에서 '문학은 상처를 다독거리며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가려는 의식적 반응의 산물'이라고 규정하는데 고통 속에서, 고통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쓴 두 분의 글은 이러한 문학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음미하게 한다. 선배 변호사님이 하신 조언의 참뜻은 이렇듯 고통과 관련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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