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영화 '코다'. 농인(청각장애) 가족 중 유일하게 비장애인인 10대 소녀 루비가 주인공이다. 어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가족을 위해 수어 통역을 전담해 온 루비. 그가 노래하는 재능을 깨닫고 맑은 목소리로 ‘You’re All I Need to Get by’(당신은 내게 필요한 전부)’를 부르는 장면이 영화의 압권이지만, 핵심 메시지는 따로 있다. 오빠 청각장애인 루시가 가족 때문에 꿈을 포기하려는 루비에게 “사람들이 농인을 상대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해. 우리는 무력하지 않아”라고 화내는 대목. 장애인이 아니라 세상이 변해야 한다는 분노, 장애인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까. 책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을 펼치면 현실 속 루시들이 등장한다. 가령 키 120㎝ 왜소증 장애인이자 미술사학자인 어맨다 카세아. 저자 사라 헨드렌(50) 미국 올린 공과대 디자인학과 교수와 그 학생들은 어맨다가 의뢰하는 물건을 만들어주기로 한다. 강의가 많은 어맨다에게는 수업 때마다 강연대에 올라가기 위해 휴대용 발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세상이 정한 표준에 맞춰 몸을 교정하기 위해. 어맨다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발판이 아니라 내게 맞는 강연대를 만들어 주세요.” 학생들은 낯선 질문과 마주한다. ‘누가 누구에게 맞춰야 하는가.’
책은 이처럼 장애 문제를 풀어가는 새로운 실마리를 제시한다. 용감한 투쟁, 역경에 맞선 용기 등 익숙한 장애 서사와는 사뭇 다르다. 저자가 초점을 맞추는 건 ‘몸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디자인과 예술의 영역이다. “세상에는 장애를 향한 빈약한 정의가 만연하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는 힘은 한없이 부족하다. 오래 굳어진 ‘정상’이라는 관념을 파헤치기 위해 공학뿐 아니라 예술과 디자인이 주는 도발도 필요했다.”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인 저자 역시 세상을 뒤흔들었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뉴욕에서 사용되던 표준 장애인 마크는 우리가 흔히 보는 뻣뻣한 팔과 다리로 휠체어에 앉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장애인이 힘차게 휠체어를 밀고 나가는 역동적 마크를 만들었고, 이를 뉴욕 곳곳 장애인 표지판에 몰래 붙인다. 뉴욕시는 불법이라고 낙인찍었지만, 시민들은 호응했다. 2014년 뉴욕시 공식 장애인 마크로 채택된다. ‘장애인도 활동적이고 독립적일 수 있다’는 공감대가 만든 변화다. 이쯤에서 저자의 아들이 다운증후군 환자라는 점도 밝힌다. 아들이 사회적 편견을 뚫고 보다 나은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저자가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은 테크놀로지의 명암. 사이보그 등 첨단 기술은 장애인의 삶을 개선시키겠지만, 몸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가릴 수도 있다. 저자가 만난 외팔 장애인 크리스 이노요사는 한 팔과 겨드랑이만으로 일상을 영위하는 사례다. 칼자루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한 손으로 아보카도를 말끔히 잘라내거나, 테이블 귀퉁이를 활용해 한 손으로 장갑을 끼는 식. 아들의 기저귀를 한 손으로 갈아주는 일만큼은 만만치 않았는데, 크리스는 아이의 발을 공중에 띄우는 발걸이를 만들어 해결책을 찾았다. 참고로 크리스는 의료용생체공학 제품을 만드는 공학자. 어려서부터 의수를 거부한 그는 주어진 조건을 활용해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을 체득해 왔다.
영화 코다의 결말 부분, 마을 사람들이 주인공 가족들과 수어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영화 같은 얘기일까. 2018년 미국 농인 대학인 갤러데트대학 앞에 ‘수어를 사용하는 스타벅스’가 문을 열었다. 직원들은 수어로 주문을 받고, 소리 대신 화면으로 음료가 마련됐다고 알린다. 싱가포르에서는 2014년부터 노인과 장애인들에게 ‘그린맨 플러스 교통카드’를 제공한다. 카드를 신호등 버튼에 대면 횡단보도 보행 시간이 10초 이상 연장된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일반인도 나이가 들면 장애인과 같아진다’는 시간의 법칙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사람들이 장애인을 상대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해”라는 질문에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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