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애냐?"
들으면 어쩐지 기분이 편치 않은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 나에게 저런 이야기를 한다면 십중팔구 나의 '언'과 '행' 중 무언가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나이가 어릴수록 뭔가 어설프다는 의미가 은연중에 깔려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정보의 포화 상태를 넘어서 정보가 흘러넘치는 시대다. 이젠 아이들도 언제 어디서나 궁금한 걸 찾아볼 수 있고 관심 분야에서는 어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오히려 디지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어른들이 뭔가에 어설프게 대응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삶은 전체적으로 '코끼리를 집어삼킨 보아뱀'으로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모자인데? 저건 99.9% 모자야" 하는 어른들과 "저게 어떻게 모자예요. 뱀이 코끼리를 삼키고 배불러서 쉬고 있는 건데" 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사이에 "그래. 모자로도 볼 수 있고 뱀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평화주의자들이 공존하는 삶. 또, 보아뱀의 형태를 그래프로 보면 우리네 '어떤' 주기를 유추할 수 있다. 유아 시절 저지대에 머무르다가 10대, 20대의 상승기를 타고 30대에 최고점을 지나 직장, 결혼, 육아 등의 살짝 침체기(?)를 겪은 후 약간의 상승을 한 뒤 하락기를 거쳐 유아기의 저지대를 다시 걷는 모습. 뭔가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공감되지 않는가?
명색이 부모인지라 요즘 '육아서'라고 통칭하는 책을 종종 보곤 하는데 의외로 이 속에는 삶의 지혜라든가 혹은 통찰이 숨어 있다. 우리는 즐거웠던 20대, 30대를 거치고 40대 즈음 되어서야 뒤를 돌아보고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살핀다. 사실 그동안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기도 했고 그만큼 바쁘게 혹은 재미있게 살았기 때문일 거다. 그 말은 이제야 좀 나를 챙길 시기가 되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 진심으로 감탄하며 '경이감'을 느껴 보았을까? 학창시절 혹은 연애하던 시절이 마지막이었을까? 지금, 웬만큼 다 익숙하고 다 그저 그렇고 시시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진 않을까. 최근 읽은 카트린 레퀴예의 '경이감을 느끼는 아이로 키우기'는 비단 아이에게 경이감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것뿐 아니라 나 자신도 돌아보게 했다. 여기서 경이감이란 감탄, 경탄, 호기심 등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인데 이게 삶의 활력이 될 수 있다. 그건 예를 들어 다 큰 어른들이 드라마나 가수나 작가 등에 몰입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경이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시키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찾고 열중하게 되어 있다는 게 이 책의 핵심일진대 어째서 나는 이 쉬운 걸 늘 알면서도 잊어버리는 걸까.
경이감은 어쩌면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는 고차원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심심하면 바뀌는 취미라기보다 높고 푸르른 산과 넓고 파란 하늘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 아닐는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우리가 홍삼의 질을 평가할 때 사포닌 함량을 따지는데 그것이 '홍삼의 효능=사포닌'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거다. 발견을 못 했을 뿐이지 사포닌과 다른 무언가가 더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이나 자연에서 나온 것들은 늘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는 자연에서부터 나왔다. 경이감을 느끼고 밝게 웃던 아이도 바로 우리였다. 잊지 말자. 구증구포(九蒸九曝) 되었지만 삼(蔘)은 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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