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살펴보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이 가진 특징을 직접 비교하는 문장이 10여 군데 나온다. 흔히 '군자'와 '소인'을 사회적 직위가 높고 낮음을 말하는 것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논어'에서는 두 유형의 인간상(人間像)을 주로 도덕적 관점에서 구분하고 있다.
이 구분은 '의(義)'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 된다. 의란 현대적 용어로 '공정성의 원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개인적 이익을 넘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공정성의 원칙'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 물을 수 있는 '의지'를 발현하고 실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군자'와 '소인'이 구분된다.
공자는 "군자는 의에 밝지만, 소인은 이(利)에 밝다(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소인유어리·小人喩於利)"고 하고, 또한 "군자는 두루 사귀고 소통을 잘하고 편당(偏黨)을 짓지 않지만, 소인은 편당만을 짓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군자주이불비·君子周而不比, 소인비이부주·小人比而不周)"고 말한다. 그리고 "군자는 화합하나 부화뇌동하지 않지만, 소인은 부화뇌동만 하고 화합하지 못한다(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고 군자와 소인의 특성을 규정한다. 도덕적 품성과 덕성을 갖추고, 개인의 사적 이익을 넘어 자신의 양보와 희생을 바탕으로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면, 그와 반대로 도량이 좁고 간사하며 이기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타인에게 해를 끼는 사람을 '소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매일 새로운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선택을 어떤 기준과 방향으로 결정하느냐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갈리게 된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크고 작은 이익을 무분별하게 좇게 될 때 어제의 '군자'가 오늘의 '소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물론 역으로 오늘의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새로운 전환을 시도하여 '군자다움'을 실현하는 것도 역시 열려 있는 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적절하게 절제하고, 비이성(非理性) 행위를 조절하면서 보다 나은 가치와 방향으로 자신을 전환하여 '자기완성'을 실현하기 위한 '극기(克己)'의 과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옳고 그름을 따져 묻는 '공정성의 원칙'에 대한 자각(自覺)이 사라져 버리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눈앞의 크고 작은 이익을 쟁취하기 위하여 무한경쟁을 벌이는 '아수라판', 즉 '소인들의 왕국'과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사회의 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고위공직자나 지식인을 막론하고 '돈'과 '권력' 앞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한 행태를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자행하고 있다.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염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벌어지고 있다. 권력과 돈에 비굴하게 굴종하는 '소인'의 삶에서 벗어나 인간의 품위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실행하는 '군자다운' 삶에 대한 자각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순자(荀子)가 "정도(正道)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지 않는다(종도부종군·從道不從君)"고 하는 그 결기를 우리 모두 다시금 돌아보아야 하겠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