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넷플릭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피지컬: 100'은 '가장 완벽한 신체 능력을 갖춘 최고의 몸을 찾기 위해 100인이 모였다'라는 설정 아래 전현직 운동선수와 군인 등이 대거 출연했다. 피지컬: 100은 기존 스포츠 영역에서 구분했던 성별이나 체급의 벽을 허물고 모든 출연자가 자신의 능력으로만 경쟁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래서 경기장에서의 약자는 체급이 낮거나 나이가 많은 남성과 여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5개의 퀘스트 중에 지구력, 순발력, 밸런스 등이 중요한 종목도 있기 때문에 이들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퀘스트 3부터는 약자에게는 불리하다. 1.5톤의 배를 끌어올려야 하고, 팀 연합을 자율적으로 맺어야 하기 때문에 근력이 최우선 능력으로 지목되었다. 결국 퀘스트 4, 5에서 약자들은 전원 탈락했고 우승은 최고의 근력을 가진 젊은 남성이 차지했다.
피지컬: 100은 예능이므로 이러한 설정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 '참여자들의 차이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줄을 세우는 것은 공정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대한민국에는 능력에 따른 평가와 보상은 공정하다는 능력주의가 만연하다. 거기다 스포츠 경기는 사회적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어 더 공정하다고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피지컬: 100은 공정하지 않다. 다만 평등하다고 할 수는 있다.
평등과 공정은 어떻게 다를까? 야구경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앞에 높은 장벽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1, 2, 3번 관람객이 그 장벽 뒤에 있는데 1번은 키가 크고 2번은 중간, 3번은 키가 작다. 1번은 상자 여러 개를 두고 높은 위치에서 경기를 즐기고 있다. 2번은 한 개를 쌓아 겨우 보고 있다. 3번은 박스가 없어 경기를 볼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조치를 취했다. 1, 2, 3번 관람객 모두에게 상자를 한 개씩 제공한 것이다. 키가 큰 1번과 중간인 2번은 상자 한 개만으로도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키가 작은 3번은 여전히 경기를 볼 수 없다. 이것이 평등이다. 개별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동일한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은 무엇일까? 키가 큰 1번이 소유한 상자를 키가 제일 작은 3번에게 제공하여 3번도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에 대부분은 동의한다.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이나 소외계층에게 제공하는 지원을 불공정이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당연히 누릴 거라 기대한 유무형의 자원이나 기회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불공정을 떠올린다. 작년 8월 시행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자산규모 2조 원 이상의 상장법인은 이사회를 특정 성(性)으로만 구성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남성 일색이었던 기업의 이사회에 여성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자격이 없는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사가 되는 것은 불공정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필자는 자주 만났다. 뭔가 불공정이라고 느끼는 순간을 만난다면, 자신이 가진 특권을 돌아봐야 한다. 인식하지 못했지만 지금껏 당연하게 누렸던 권리, 그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타인의 어려움을 알아가려 노력하는 태도가 아쉽다. 이제 우리 사회도 공정을 포용하는 사회로 변모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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