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비가 내리는 날, 풀 뽑기 좋은 날. 일찌감치 마당 일을 나선 남편을 앞세워 산책에 나섰다. 늘 다니던 윗길 대신 아랫길로 내려갔다. 윗길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빈집들을 지나는 길이고, 아래쪽에는 사람이 사는 집들을 지나는 길. 동네 어른이 밭에서 일하고 있어 인사를 꾸벅했고, 또 동네 어른 한 분이 트럭을 타고 지나가 인사를 꾸벅했다.
집들을 지나다 보니 자꾸 고개를 돌려 마당을 들여다보게 됐다. 나뭇가지가 길게 늘어진 집을 지나면서는 그 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퇴직 후 집을 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며 살았으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도 힘에 부쳐 정원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그 위로 올라가자 새로 지은 집이 나왔다. 너른 터에 반듯하게 지은 집 마당은 아직 생활의 티가 나지 않았고 가운데 함박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혼자 내년, 내후년의 정원을 상상했다. 정원은 세월이 만들고, 주인의 손길과 함께 나무와 꽃들이 자리를 잡는다.
더 올라가자 철문으로 닫힌 집이 보였다. 문 사이로 보니 안쪽에 풀이 많았다. 사람이 살았다면 생기게 마련인 대문과 집 사이 길이 없었다. 길은 곧 삶의 흔적. 살아있는 이들의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것이 길이다. 그러고 보니 대문 앞에도 풀이 무성했다. 오래 비어 있지는 않은 듯했으나 더 풀이 무성해지기 전 사람이 다녀갔으면, 생각했다. 빈집은 금세 망가지므로.
산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다 뒤돌아섰다. 산길을 걷기에는 신발이 마땅하지 않았다. 내려오면서 마을 어른을 만났다. 상추를 좀 따 가라며 비닐하우스를 가리켰다. 한쪽에 쌈채소가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다.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고 덥석 받고 보는 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 텃밭에서 자라는 것들도 이 사람 저 사람 나누기 바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 담 옆으로 댑싸리가 무리 지어 자라고 있었다.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댑싸리 모종 몇 개만 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안에 잔뜩 있다며 따라 들어오라고 했다. 마당에는 지금 한창인 함박꽃과 서양톱풀, 꽃양귀비, 금낭화, 아이리스, 골드메리 등과 미처 알지 못하는 이런저런 화초가 가득했다. 나는 "아이고 예뻐라"를 연발하며 마당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가 구경했다. 구석구석 작은 마당에서 주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저씨가 댑싸리 모종을 삽으로 듬뿍 퍼내는 동안 안에서 아주머니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책방에 오셔서 마당의 꽃들과 실내 화분들 앞에서 감탄사를 내뱉었던 아주머니는 여러 개의 트리안 화분을 보고 한 개만 달라 했었고, 트리안을 갖고 가신 후 쌈장 한 통을 갖다 주셨다. 맛있는 쌈장을 먹을 때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몰라 궁금했던 터라 나는 너무나 반가워 큰소리로 인사했다.
우리는 돌아와 댑싸리 모종을 들고 한참 마당을 이리 돌고 저리 돌다 한쪽 가장자리에 쪼르륵 심고 듬뿍 물을 줬다. 키재기를 하듯 서 있는 그것들을 보며 여름까지 쭉쭉 자랄 모습을 생각하니 내 키가 덩달아 자라는 듯했다. 가을에 다 익으면 싹둑 잘라 빗자루를 만들어야지. 떨어진 씨앗들은 스스로 겨울을 나고 내년 봄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겠지. 댑싸리 모종 앞에서 나는 벌써 내년 봄을 꿈꾸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들을 따라 산책하길 참 잘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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