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한국에서 영어 때문에 소외당하기

입력
2023.06.15 22:00
27면
0 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아파트 입주민들이 사용하는 휴대폰 앱 자유게시판이 시끄럽다. 최근 아파트 외벽 도색 작업이 진행됐는데, 아파트 간판이 새로 바뀐 색으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참에 한글로 된 아파트 간판을 떼어버립시다. 촌스러워요', '영어로 바꿔요' 등 대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굳이 돈 들여서 교체할 필요 없다', '한글로 표기된 게 좋다'는 댓글도 있었지만, 전자의 의견이 훨씬 더 많았다. 가장 아찔했던 댓글은 아파트 외벽에 한글 간판을 없앰으로써 아파트 상품 가치가 올라갈 거라는 말이었다.

출근길 지하철로 향하다 보면 종종 길을 묻는 어르신을 만난다. "○○아파트는 어떻게 가야 해요?" 한글로 적힌 아파트 이름의 종이가 있지만, 주변 모든 아파트 이름은 영어고 외벽에 붙은 간판 또한 영어다. 별수 없이 아파트의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파트 외벽 색과 함께 위치를 콕 집어 알려드린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영어를 못해서 길을 찾지 못하는 게 과연 맞는 건가? 아파트 이름을 영어로 짓고, 영어 간판 쓴다고 아파트 가치가 올라갈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며칠 전 친구 따라 유명하다는 카페와 빵집을 갔다. 입장과 동시에 내가 한국에 있는 건지, 외국에 있는 건지 혼란스러워진다. 간판부터 메뉴까지 온통 영어로만 표기되어 있기 때문. 한국에서 충실히 영어 교육을 받아왔고, 직장인이 된 후에도 퇴근 후 영어 학원에 다녔음에도 괜히 작아진다. 업무상 영어를 쓸 일도 없고,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영어 공부는커녕, 미국 드라마도 안 본 지 꽤 됐으니 말이다. 가장 익숙하고 확실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혹여나, 영어로 주문해야 하는가 싶어 잠시 고민했지만, 먼저 주문하는 손님을 보니 한국말로 주문해도 된다. 한시름 놓았다.

한국에서 한국 사람이 영어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 온통 영어로 표기된 카페에서 주문에 앞서 긴장하는 일은, 별일일까? 별일이 아닐까? 물론 아파트 이름을 짓는 건설사도, 한글 간판이니 영어 간판이니 의견을 낸 입주민들도, 영어로 간판과 메뉴판을 꾸민 사업주도 누군가를 소외시키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영어가 익숙한 이들이, 각자의 의견을 낸 것뿐이니까. 하지만 과도한 영어 사용이 익숙해지고 결과적으로 누군가를 계속 소외시키고 있는데 이대로 괜찮은 걸까? 굳이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한글도 병기할 수는 없는 걸까?라는 생각에 찝찝함이 남는다.

코로나로 잠시 운영을 멈췄던 서점을 곧 새로운 공간에서 열기로 했다. 오른쪽은 상업지, 왼쪽은 오래된 빌라 주거지가 있는 곳이다. 주거지에는 대부분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많다. 별생각 없이 간판과 창문에 영어로 운영 요일과 시간을 적으려다가 아차 싶어 한글로 표기하기로 했다. 서점에 일부러 찾아와 주는 손님들뿐만 아니라, 동네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서 새로 생긴 곳이 뭐 하는 곳이고, 언제 문을 여닫는지는 어려움 없이 아셨으면 하는 마음이기 때문.

퇴근길 아파트 자유게시판에 접속했다. 그새 또 외벽 간판에 대한 입주민들의 의견이 쌓여 있다. 한참 살펴보다가 댓글을 남겼다. '한글 간판 그대로 유지했으면 합니다. 한국에서 굳이 영어 간판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김경희 오키로북스 전문경영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