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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만 훑고마는 건너뛰기

입력
2023.06.25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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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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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인 큰애와 대화하다 '교카를 충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교카'가 뭔가 싶어 다시 물었더니 '교통카드'란다. 그걸 굳이 두 글자 아껴서 말한다고 엄청나게 효율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종종 나처럼 그게 뭐냐고 되묻는 사람에게 설명해 주려면 오히려 더 번거로운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이번엔 효율적으로 말을 아끼려는지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생각해 보면 나도 젊었을 때 저런 줄임말을 많이 썼고, 또 그런 줄임말에 불편해하는 어른이 쓴 신문 칼럼을 종종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 보수적이 되었나 보다 하고 넘어가기엔 요즘은 그런 '건너뛰기'가 점점 삶의 여러 방향으로 과도하게 퍼져 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대학 입시 업무를 보다가 고등학생들이 제출한 독서목록을 보고 꽤 어려운 철학책들이 많이 있어서 놀랐다. 이 학생들은 입시 준비하기도 바빴을 텐데 대학생들에게도 어려울 이런 책들을 언제 이렇게 많이 읽었을까 혼잣말을 했더니, 옆에 있던 동료 교수가 피식 웃으며 직접 읽은 책도 없진 않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축약본으로 읽었을 거라고 넌지시 알려 주었다. 어느 대학에서 선정한 명저 100권 같은 목록에 담긴 책들을 주욱 요약해서 다시 한두 권의 책으로 정리한 중고등학생용 서적들이 있다고.

하긴 책뿐이랴. 요즘은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시대이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영화를 본 게 언제인지 나 역시도 가물가물하다. 2배속으로 속도를 빨리해 놓고 보거나 중간중간에 10초 건너뛰기를 쉴 새 없이 눌러가며 보거나, 그도 아니면 어느 유튜버가 10분 내외로 결말까지 포함해서 요약해 놓은 짧은 영상을 보면서 '아, 이런 내용이었군. 자, 다음!' 하고 넘어가는 게 나도 습관이 된 지 오래가 아닌가. 심지어 요즘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SNS는 20초 내외의 동영상으로 가장 재밌는 부분만 짧게 짧게 보여주고 넘어가는 이른바 '숏폼'(short-form) 매체들이니 '건너뛰며 살기'는 이제 우리 모두의 시대정신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나다 도요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요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콘텐츠가 과잉공급되는 세상에서 가성비를 좇는 세태를 지적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휴식을 위한 오락마저도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해야 한다는 지독한 경쟁논리에 내몰리고 있는 현대인의 삶이 놓여 있다.

하지만 당연히 요약본은 실제 작품과는 다른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무인도에 표류해서 28년간 혼자 살다가 구출된 선원의 이야기'라고 요약한다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로빈슨이 무인도에서 곡식을 키우고 그릇을 만드는 신기한 이야기도, 프라이데이를 만나 나누는 우정의 이야기도, 미지의 섬을 탐험하고 식인종과 싸우는 가슴 뛰는 모험의 이야기도 모조리 빠져 있기 때문에 실제 소설과는 '다른 것'이 된다. 소설의 진정한 본질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정신없이 여기저기로 건너뛰며 위태롭게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효율적인 삶이라기보다 정말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만 겨우 수습하고 있는 요약본 같은 삶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엔 너무 길어서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늘 본 척만 하고 있던 고전 영화 한 편을 진득하게 볼 생각이다. 건너뛰기 없이.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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