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끈하게 달궈진 여름 공기에 갇혀 머릿속까지 엉키는 기분이 들 때면, 커다란 빙하를 스쳐 오던 그 차갑고 냉랭한 바람을 상상한다. 적도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지구 반대쪽, 남반구를 널찍하게 차지한 아르헨티나는 색다른 것을 보고 싶다는 여행의 1차적인 욕망을 가장 크게 충족시키는 나라다. 우리와는 정반대의 계절, 정반대의 자연. 특히나 남극을 향해 뻗어가는 아메리카 대륙의 끄트머리, 펭귄을 볼 수 있는 아르헨티나 최남단의 마을 '우수아니아'와 살아 움직이는 대륙빙하의 탐험지 '엘 칼라파테'(El Calafate)가 자리 잡은 파타고니아 지역은 '지구의 끝'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크나큰 빙하를 품고 있어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듯한 황량한 도시 엘 칼라파테. 거센 바람과 잔뜩 찌푸린 날씨 때문이었을까?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러 가는 버스에는 왠지 모를 비장함마저 흘렀다. 빙하를 움직이지 않는 얼음 산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많지만, 빙하(氷河)는 천천히 움직이는 '얼음의 강'이다. 먼 옛날 바다 아래 땅이 치솟아 4,000m 높이의 안데스 산맥이 되고, 그 고원으로 태평양의 습기가 눈이 되어 내리고, 녹지 않고 한없이 쌓인 눈덩이는 얼음으로 바뀌어, 주체할 수 없이 무거워진 얼음덩이가 점점 아래로 이동하는 것이 페리토 모레노 빙하다.
이렇게 매일매일 자라는 얼음이 하루에 2m 정도. 그 길이만큼 고원 아래 호수 쪽으로 밀려난 빙하 가장자리는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바다의 물이 산의 눈이 되고 빙하의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호수의 물로 돌아가는 거대한 물의 순환. 수만 년에 걸쳐 이어지는 자연의 흐름이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갈 수 있는 빙하와 가장 가까운 곳, 빙하를 마주 보는 전망대 난간에는 이미 사람들이 대롱대롱 일렬로 섰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높고도 광대한 빙하는 빛에 따라 무한한 흰색이었다가 깊은 푸른색이었다가 번쩍하고 에메랄드 빛을 머금는다. 호수 건너인데도 고개를 들어 올려봐야 하는 수십 미터 높이의 얼음 장벽이 끝도 없이 이어지니 스멀스멀 전망대를 덮칠 듯 압도적이다.
크르르르릉! 하염없이 빙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시간이다. 수만 년 전 생겨난 얼음이 마침내 사람들 눈앞까지 밀려나 무너져 내리는 순간,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는 천둥 치듯 호수에 울려 퍼진다. 장엄하다는 말이 더 맞아 보였던 빙하 얼음으로서의 마지막 순간. 숨죽여 이때만 기다리던 여행자들은 또 다음의 수만 년 전 얼음을 기다리는 무언의 명상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내내 더웠던 이번 여름, 지나온 기억만으로도 콧속 깊이 찬바람을 일으키던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무서운 속도로 녹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 2년 동안 줄어든 길이가 무려 700m. 1998년부터 2019년까지는 연평균 1m가량 줄었으니 녹는 속도가 350배나 빨라진 셈이다. 스위스 알프스에서도 눈과 얼음 밑에서 보이지 않던 실종자들의 유해가 나오는 사례가 잦아졌다. 1986년 실종된 독일인 등반가도, 1968년 추락한 경비행기 잔해도 얼마 전 빙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기후변화에 빙하가 녹아내린 탓이다. 이렇게 자연이 애써 가려주던 인간의 어둠이 낱낱이 드러난다. 슬프게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또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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