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수의 마음 읽기]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클리닉에서 가끔 만나는 직장인이 있다. 번아웃으로 시작한 우울증으로 한동안 약도 먹고 상담을 하고 나서는 거뜬하게 잘 지내는 중인데, 몇 달에 한 번씩 정비소 들리듯 와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가는 분이다.
요즘은 새로 부임한 윗분 때문에 고민이라고 한다. 밝고 친절한 성격이면서 후배들에게도 신뢰를 받는 분인데, 가끔 일 처리 과정에서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고객에게 상품 설명을 하면서 투자 위험성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바람에 손해를 입은 고객이 크게 항의를 하는 일도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 같다고 한다. 원래 자신의 모습은 그게 아닌데, 일 처리를 융통성 있게 하다 보니 일어난 일이니까 떳떳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속 인생을 살면서 ‘코팅된 인격’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직장이라는 게 타고난 내 기질과 성격 그대로를 가지고 살 수는 없으니까,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어, 이게 아닌데’하는 부적절감을 느끼더라도 그냥 일을 하면서 생기는 일이니까, 내 본래 인품에는 영향을 받지 않게 하려는 방어 기제의 일종인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성격을 ‘테플론 인격(Teflon Personality)’이라 부른다. 마치 프라이팬에 음식이 달라붙지 않게 테플론 코팅을 해 놓은 것처럼 일 때문에 벌어진 일은 내 원래 인격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과장과 거짓말로 인해 고객에게 큰 손해를 주었더라도 그건 회사 직무를 가진 또 다른 내가 한 일이지, 원래 착하고 고결한 인품의 내가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 큰 스캔들을 일으켰던 엔론이라는 금융사 임원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먹거리 장사를 하면서 만만한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크게 뒤집어 씌운 상인이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 자리에 있으면 그럴 수 있어. 내가 그런 건 아니고, 자리 때문에 한 일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 처리를 핑계로 팀원 인격까지 거론하며 소위 갑질을 하고 나서도 ‘나는 원래 따뜻한 성격인데, 지금은 회사에서 이렇게 해야 기강도 잡히고 일이 잘 돌아가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디어에서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좋지 않은 일들은 상황때문이지 자신의 원래 성격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인 테플론 인격의 소유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청나라 말기에도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이 없이 ‘두꺼운 얼굴과 검은 마음’으로 일을 해 내는 사람이 경쟁에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후흑학(厚黑學)을 주장하던 리쭝우(李宗吾)라는 학자도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현대 사회에도 본인만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오직 승리를 위해서 얼굴은 두껍고 속은 시꺼먼(면후심흑·面厚心黑)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이들 중에는 운 좋게 사회 시스템 정점에 올라가 사람들을 호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회사 임원들처럼 법의 단죄를 받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는 코팅된 인격을 가지고 있기에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가 별로 없고, 오히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물러나는 경우가 더 흔한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코팅된 인격을 본인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나쁜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좀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보면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 코팅된 인격의 좋은 사용법도 찾아 볼 수 있다. 바로 실패와 좌절을 겪을 때의 대처법이다. 잘 준비했던 일들이 수포로 돌아간 순간에는 넘치던 의욕도 풀이 죽으면서 죄책감과 좌괴감, 능력에 대한 의심이 머리를 든다.
아닌 척하고 집에 돌아가지만, 잠들기 직전 ‘이불 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역시 나는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너무 큰 일을 기대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사회 속 인생을 사는 우리들도 실패하고 좌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일단 삶과 일에는 실패가 많다는 걸 인정하자.
그 다음엔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자. 원칙에 따라 할 일을 했다면 좋지 않은 결과를 얻어서 욕을 먹더라도 너무 상처 입을 필요는 없다.
잠깐 동안 마음을 다스리고 하던 일을 그대로 지속하면 된다. 실패에서 얻은 교훈에 따라 약간의 계획 변경도 받아들이는 융통성도 필요하다. 오늘 받은 일의 결과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하기 위해 얻은 오늘의 교훈인 것이다. 성공은 마지막 즈음에 한 번이면 족하지 않은가. 누가 옆에서 뭐라 화를 내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사회 속 나는 마음에 적당한 코팅을 하고 살아가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남을 무시하거나 이용하는 것은 나쁜 사람들이 사용하는 ‘테플론 인격’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양심’을 코팅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마음의 회복력을 튼튼하게 하고 오늘 하루를 끈기 있게 살아가기 위해 내 가치에 맞는 ‘당당함과 건강함’으로 내 인격을 코팅해 보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