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되고 직장인이 되면서 새로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맥락 없이 해석할 수 있던 대학교 시절의 언어와 달리 사회생활을 하고 다시 만난 한국어는 맥락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어려운 면이 많은 언어였다. 어느 순간 내 안에는 나만의 시니컬한 한국어 사전이 생겼고, 사회생활을 하고 뉴스로 사회를 다시금 배우면서 이 사전에는 속속 단어들이 새로 등재됐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자유라는 단어에는 항상 책임과 피해가 뒤따랐다. 내가 책임질 수 있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자유였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리더들이 말하는 자유는 나만 하고 싶은 대로 할 방종을 의미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판하는 언론을 압수수색했고 공영방송인 KBS는 여당 관련 인사를 멀쩡한 프로그램에 내리꽂았으며 YTN은 대통령 풍자 영상을 자진 삭제했다. 자유에는 결국 리더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선이 있었다.
2010년 초부터 유행한 단어가 소통이다. 다시금 돌아보면 우리가 원하는 소통은 당신이 나를 무조건 따르길 바라는 일종의 대결이 아닐까 싶다. 총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앞으로 더 자주 소통하겠다는 대통령은 한 해병대원의 죽음 앞에 침묵하고 있다. 소통하겠다며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겼는데, 도어스테핑도 없애고 거부권 신기록을 경신하는 걸 보니 한국 사회에서 소통이란 내가 원할 때만 하는 건가 보다.
책임을 지는 일은 무엇일까. 진영을 막론하고 리더들은 책임을 진다고 말하지만,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은 보기가 어렵다. 법적으로 잘못한 정치인은 갑자기 비법률적인 방법으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말한다. 음주운전을 한 가수는 법적으로 책임지기는커녕 공연으로 갚겠다고 한다. 작년 금융위기설까지 불거지게 한 김진태 강원도지사는 결국 책임지지 않고 넘어갔다. 책임은 자신이 진다는 명패를 둔 대통령은 직구 금지와 채 상병 특검 거부권 등 불리한 이슈에는 참모를 앞장세우고 있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에서 책임진다는 말은 생색내기가 아닐까 싶다.
최악의 단어는 국민이다. 정치인들은 대개 자기 좋은 일 할 때만 국민을 들먹이기 일쑤다. 혹은 책임지기 싫을 때 국민이라는 단어를 쓰곤 한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최종적으로 국민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연금개혁안을 제시했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더 내고 덜 받자고 이야기해도 모자랄 마당에 더 내고 더 받는 안을 제출해 버렸다.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기 위해 시민대표단을 끌어들이고 무마시켰다. 그저 국민이 원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결국 국민이라는 추상적인 단어 뒤에 숨어서 누구 하나 기득권 목에 방울을 달려고 하지 않는다.
리더란 무엇일까. 위인전을 비롯해 현대사회의 여러 최고경영자(CEO)를 본다. 아프지만 해야 할 말을 하며, 기득권의 반발을 불러일으켜도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만의 시니컬한 한국어 사전에서 리더란 평소에는 생색을 내고, 조명은 자신이 받고자 하며 결국 불리할 때는 '나 몰라라' 도망가는 사람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내 한국어 사전이 부디 아직 많이 모자라고 치기 어린 나만의 일기장으로 국한되길 바란다. 국민 뒤에 숨지 말고, 리더라는 완장에만 만족하지 말고 나만을 위한 소통과 자유만 탐닉하지 않는 리더들이 보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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