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열장 안 토슈즈 한 쌍이 시선을 끌었다. 익숙한 분홍이 아닌 흰색. 누군가 오래 신어 발뒤꿈치 쪽은 헤지고 곳곳에 얼룩이 생긴 발레용 토슈즈였다.
토슈즈 옆 안내판에 '발레 1994'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현대사 최장기 포위전(세르비아군은 1992~1995년까지 무려 1,425일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했다)으로 기록되며 10만 명 넘는 목숨을 앗아간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멜라는 막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여덟 살 아이였다. 매일 수십 차례 총소리가 울리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는 생지옥이 연출됐지만, 그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라나야 한다. 1994년, 발끝으로 설 수 있는 열 살이 되자 발레단에서 또래 아이들에게 토슈즈 한 켤레씩을 배급했다. 한데 멜라에게 주어진 건 오매불망 바라던 분홍이 아닌 흰색 토슈즈였다.
실망한 표정을 짓는 멜라에게 발레 선생님이 흰색 토슈즈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구호 물품으로 들어온 분홍색과 달리 흰색 토슈즈는 전쟁 전 사라예보 사람들이 만들었던 자국 제품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멜라가 선망하던 프리마돈나, 사라예보 국립극장에서 공연하는 발레리나들은 모두 이 흰색 토슈즈를 신고 연습했을 터였다. 흰색 토슈즈에 얽힌 이야기는 전쟁의 공포를 딛고 멜라가 꿈을 향해 정진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극단의 고통 속에서도 바깥의 시간은 잔인하게 흐르고, 어둡고 때로 절망스러운 터널을 견뎌내야만 우리는 살아남는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 '전쟁을 겪은 어린이들의 이야기'는 그 견뎌냄의 동력이 되는 실낱같은 빛이 무엇인지를 가늠케 한다. 그건 저기 어딘가, 캄캄한 현실 너머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연대의 기억, 웅크린 채 함께 짜내는 이야기의 힘일지 모른다. '진단명: 가까스로 살아남음. 치료 후 의사 소견: 5세에 새롭게 출발!' 포격 현장에서 구출돼 병원으로 옮겨졌던 1987년생 벨마가 공포의 유년기를 버텨내는 동안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의사가 써준 이 특별한 진료 결과지였다. 구호단체가 지원하는 통조림 캔을 빠짐없이 모아서 훗날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1981년생 필립은 "자, 다음 주 월요일이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라고 말하며 친구들과 함께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를 통조림 캔과 포장재를 모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전쟁은 계속됐고, 이 컬렉션은 그 시절 그들의 기억을 보존하는 통조림 기념비로 재탄생했다.
전쟁, 기아, 재난 속에서 아이들은 가장 취약한 존재다. 부모, 친구, 오빠의 죽음을 무력하게 목도한 아이들은 평생 털지 못할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전시장을 천천히 돌면서 38개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안도와 슬픔이 팽팽하게 시소를 탔다. 살아남은 그들의 이야기에 가슴을 쓸어내리기 무섭게 분쟁 현장 곳곳에서 지금도 수많은 아이가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현실이 떠오르면서 분노와 슬픔이 차올랐다.
1994년, 흰색 토슈즈를 신고 아라베스크와 아상블레를 연습하던 멜라는 사라예보 국립극장의 프리마돈나가 되지 못했다. 전쟁 후의 삶은 멜라를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다만 낡은 토슈즈는 멜라가 눈물겨운 과거 그리고 예상과 다르게 펼쳐진 현재를 회한 없이 끌어안은 증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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