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남화숙 '체공녀 연대기, 1931~2011'
"그때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을까, 이 땅의 민주화가 이만큼이라도 가능했을까, 오늘날의 민주노조 운동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1970년대에 활약한 여성 노동운동가 8명을 다룬 책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2004) 발간사의 한 대목이다. 베테랑 여성 노동운동가 이철순의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1987년 이후 남성이 주도하는 대기업 노조 중심으로 재편된 노동계는 이 시기의 여성 노동운동사를 '의도적으로' 지웠다.
한국학 분야 대표 노동사학자 남화숙이 최근 펴낸 '체공녀 연대기, 1931~2011'은 뭉텅 잘려나간 여성 노동사를 다시 쓴 책이다. 시곗바늘을 더 뒤로 돌렸다. "식민지 조선의 엄혹한 조건에서도, 해방 후 노동법이 형성되는 결정적 국면에서도, 권위주의 시대 극도로 폭력적인 탄압 속에서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압력 속에서도" 끈질기게 맞서 싸운 여성 노동사를 복원하면서다. 2020년 미국에서 먼저 나온 책은 미국역사학회가 주는 존 페어뱅크상(2022년)과 미국 아시아학회의 제임스팔레상(2023년)을 받았다.
강주룡부터 김진숙까지 '체공녀들'의 연대기
책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2014)를 통해 1960~1970년대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노동운동사를 발굴한 저자가 이번에는 개인적 숙원을 이뤘다. 그는 "미국 시애틀의 워싱턴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과정을 시작한 1990년대 초부터 20세기 한국사를 노동과 젠더에 초점을 맞춰 다시 쓰는 작업을 꿈꿔"왔던 터다.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여 '체공녀(滯空女)'라는 별명을 얻은 고무공장 여공 강주룡과 2011년 부산 조선소의 35m 높이 크레인 위에서 309일을 난 여성 용접공 김진숙은 이 책을 쓰게 한 계기다. 한 세기를 초월한 두 여성 노동자가 겹쳐지고 연결되면서다.
일제강점기 3대 파업 중 하나인 1930년 평양의 고무 총파업을 겪으며 강주룡은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근대적 자의식을 갖춘 여성 노동자로 성장했다. 고공 투쟁뿐 아니라 단식 투쟁, 공장 습격, 가두시위 등 격렬했던 1930년대 식민 조선의 노동자 투쟁 중심에는 '여공'이라 불리던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서슬 퍼런 1970년대에도 맞서 싸웠는데
이는 해방 정국에도 이어졌다. 1951~1952년 조선방직 쟁의는 "민란을 방불케 한 분규"였다. "우리의 여동지들"이 하루 만에 파업을 조직해 6,000여 명의 참여를 이끌 만큼 조직적 운동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최초의 노동법 통과에 기여한 핵심 쟁의로 평가된다.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시기인 1976년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여성해방의 대의를 접목한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를 결성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학계나 일반 대중의 이해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젠더 의식"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정규직 권리 투쟁이라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불씨를 퍼뜨린 김진숙이 '체공녀들의 연대기'를 완성했지만 남성 정규직 중심의 주류 노동운동은 여성의 자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저자는 "사회적 관심을 끈 노동쟁의도 여성들이 실제 전투력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노총 남성 지도자들이 상황을 지도·통제하고, 언론도 거기에만 관심을 집중했다"고 지적했다. 여성이 다수인 사업장의 파업도 더 이상 '여공 파업'으로 불리지 않았다. 여성 노동자의 지위 역시 '여공 투사' '여동지'에서 멸칭인 '공순이'로 떨어졌다.
작은 불꽃들 외면한 남성 중심 노조
1980년대 이후에는 여성의 투쟁을 폄하하는 담론이 완전히 득세했다. 여성 노동운동은 '물질적 빈곤'에 대한 단순한 반발이며, 사상적·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운동으로 평가절하됐다. 저자는 "노동운동 주도 세력이 된 대기업 남성 노조원에게는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새로운 서사가 필요했다"며 "그들 관점에서 1970년대 여성 운동이 다시 쓰였다"고 했다.
1970년대는 남성 노조원들에게 '흑역사'이기도 하다고 책은 짚는다. 가혹한 노조 탄압에도 여성들은 버틴 반면 남성들은 침묵하거나 반(反)노조 행위에 가담했다. 민주노조 여성을 겨냥해 "남자의 자존심에 호소"했던 사측의 노조 와해 공작도 잘 통했다. 남성 노동자 역시 "여자들 치마폭에 싸여 그 밑에서 일하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며 여성 노조 지지를 꺼렸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새 민주 노동운동의 시작"으로 정의됐고, 이전의 여성 노동운동사를 지우는 데 동원됐다. 전태일보다 앞선 1962년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숨진 전남방직 '여공' 김양, 1991년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부산 신발 대기업 대봉의 숙련 미싱사 권미경 등 "여성 노동자들이 쏘아 올린 작은 불꽃들은 외면"당했다.
이들의 역사를 도려낸 진보적 지식인과 민주노총 활동가들에게 현재의 비정규직은 신자유주의가 낳은 '새로운' 노동 착취 형태일 뿐이다. 1970년대 여공과 오늘날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사이의 구조적 연결성을 놓친다면, 이 질문에는 영영 답할 수 없게 된다. "그 많던 여공은 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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