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 '증명과 변명'
1995년생 우진(가명)은 서울 한복판 자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산다. 3수를 해서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했지만 원하는 곳은 아니었다. 군대에서도 수능을 두 번 더 쳤다. 여섯 번째 수능도 신청했지만 시험을 치진 않았다. 이성애자이고 연애를 해본 적은 없다. 대학을 자퇴하고 주식 투자를 하고 있다. 수익률은 꽤 성공적이다.
우진은 1년 전 자살을 계획했다. 정확히 말하면 자살 유예 계획이다. 그가 일명 '폭탄 목걸이를 걸었다'고 표현하는 이 계획은 온라인 게임에서 캐릭터의 체력이 너무 낮아서 죽기 직전인 상태일 때, 일정 시간 안에 적을 처치하면 살 기회를 한 번 더 얻게 되는 기술이다. 인문계열인 그는 코딩을 공부해서 자신이 구상 중인 프로그램을 특정 날짜까지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자살하겠다고 결심했다.
신간 '증명과 변명'은 우진의 동갑내기 동네 친구이자 문화인류학 연구자인 안희제(29)씨가 이 계획을 듣고 친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썼다. 안씨가 우진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수차례 진행한 내밀한 인터뷰를 담았다. 안씨는 친구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작업이 "청년 남성의 삶 안에서 어떻게 우울과 강박이 만들어지는지,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좌절되는지,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진은 그간의 실패를 모두 '내 잘못'으로 돌린다. 연애의 기회를 놓친 것도, 바라던 대학에 가지 못한 것도, 자신의 매력과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변명할 여지도 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주식 투자에선 조금이나마 능력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문제는 주식 시장이 매일 열린다는 것이다. 매일 증명해야 하는 삶이란, 매일 수능을 보는 기분이다. 반복된 패배감은 그를 우울과 강박으로 서서히 내몬다. 옴짝달싹 못하는 속박감은 죽음으로서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저자가 우진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겠다고 하자 "청년 남성들이 연루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청년 남성이 수능, 연애(섹스), 군복무, 취업 등의 "정보"로만 설명되는 기괴한 현실에서 "청년 남성 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치인들에게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외주 받아 이용당하는 청년 남성에게 자신을 설명할 언어와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미디어에서 여성 혐오와 극우 성향의 '이대남'으로만 소비되는 이들에게 새로운 해석과 비판의 가능성을 열어주고자 했다.
이 책은 굉장히 사적인 경험이면서 동시에, 우진이 "K-타임라인"이라고 표현하는 생애주기에서 실패하고 이탈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대입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증명해야 살아남고 실패해도 변명할 수 없는 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 우진에 관한 책이다. 사회가 치밀하게 놓은 '성공한 인생' '안락한 삶'이라는 허상의 덫에 걸려든 모든 우진을 위한 우정어린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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