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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 훔쳐보던 비밀경찰, 블랙리스트의 빨간 줄을 지웠다

입력
2024.12.04 14: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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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성의 공연한 오후]
연극 '타인의 삶' 리뷰
2007년 동명 영화 원작
배우 손상규 연출 데뷔작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연극 '타인의 삶'. 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연극 '타인의 삶'. 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삶을 성찰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해 온 예술은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력하다. 이기심이 증오를 부추기고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극단적 상황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인간의 기본적 양심조차 지켜지지 않은 상황에서 종종 흔들린다. 예술이 무력하다고 느껴지는 시대에 연극 '타인의 삶'은 예술이 만들어내는 긍정적 변화에 힘을 실어 주는 작품이다.

2007년 동명의 독일 영화가 원작이다. 영화는 영국과 미국, 유럽의 여러 상을 받았고 국내에서도 충성도 높은 팬이 많아 최근 재개봉했다. 원작의 이야기는 그대로 따르면서 연극적으로 세밀하게 풀어간다. 베를린 장벽 붕괴 전인 1980년대 냉전 시기의 동독이 배경이다. 국가보안부 슈타지의 비밀요원 비즐러(윤나무, 이동휘)는 사회주의 체제와 자신의 업무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인물이다. 빈틈없는 일 처리와 상대의 허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심문 기술로 당의 평가가 높다. 그에게 극작가 드라이만(정승길, 김준한)과 그의 애인이자 배우인 크리스타(최희서)를 감시하라는 임무가 떨어진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집을 도청하며 그와 예술가 친구들의 삶을 엿본다. 비즐러가 의심스러운 인물이라고 여겼던 드라이만은 체제에 협조하며 자신의 작업을 연명해 가는 순응적 인물이었다. 드라이만은 국내외 명성과 고위 간부와의 친분을 방패로 엄혹한 시대에 가까스로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예술가를 탄압하는 햄프 장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작업을 금지당한 동료 예술가를 위해 소극적 목소리를 낼 뿐이다. 드라이만을 도청하라고 지시한 햄프 장관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햄프 장관은 드라이만의 연인인 여배우 크리스타에 대한 그릇된 욕망으로 연적인 작가를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도청하며 체제 유지라는 미명하에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부패한 지도부의 만행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천천히 일어난다. 당이 일과 예술을 빼앗아 7년째 아무 일도 못 하다가 결국 자살을 하는 연출가의 죽음이나, 거대한 폭력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날 선 분노, 그리고 상처받은 연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지켜보며 비즐러의 신념이 서서히 무너진다. 무엇보다도 예술이 그의 삶을 변화시킨다. 예술은 이념 속에 냉각된 인간다움을 회복시킨다. 작가가 읽던 브레히트의 시집을 훔쳐 암송하는 장면은 서서히 삶에 눈떠가는 비즐러를 보여준다.

연극 '타인의 삶'. 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연극 '타인의 삶'. 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감시 대신 예술가의 보호자가 되는 비밀경찰

연극 '타인의 삶'. 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연극 '타인의 삶'. 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타인의 삶을 주의 깊게 살피던 체제의 감시자가 억압받는 예술가의 보호자가 된다. 도청과 감시를 통해 체제에 반하는 증거를 찾아야 하는 비밀경찰 비즐러는 자신의 본분을 잊고 감시 대상자의 일에 개입한다. 친한 동료 예술가의 죽음 이후 동독의 현실을 폭로하는 글을 쓰는 드라이만을 고발하는 대신, 사실을 감추고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위험을 무릅쓴다.

이후 의심의 손길이 드라이만에게 미치면서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 이어지고, 손에 꼽을 만한 감동적인 마무리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 자체의 매력이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원작의 서사를 연극적으로 훌륭하게 무대에 구현했다. 비즐러가 드라이만 집을 도청하는 상황을 연극에서는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집을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관찰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드라이만이 감시당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에서는 도청 장치를 무대에 쏟아내 숨겨진 진실을 드러낸다. 상황을 시각적으로 직감하게 하는 무대 연출이었다. 빈 무대에서 간단한 소품을 이용해 빠르게 장면을 전환하며 전개하거나, 영화 속 많은 인물을 삭제하거나 압축하는 대신 세 명의 조역 배우가 일인 다역으로 표현한 것도 연극적이었다. 말투나 몸짓으로 인물의 개성을 뚜렷하게 부여해 한 배우의 여러 배역이 잘 표현됐다.

작품의 각색과 연출은 양손프로젝트의 멤버이자 올 초 사이먼 스톤 연출의 '벚꽃동산'과 1인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에 출연했던 배우 손상규가 맡았다. 그의 연출 데뷔작이다. 차갑고 건조했던 영화 속 숨겨진 장면을 부각시키고 의미를 세밀하게 연극적으로 표현해냈다. 이 작품은 연출가 손상규의 시대를 연 작품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타인의 삶을 감시하다 자신의 삶이 변하게 되는 냉철한 비밀경찰의 이야기 '타인의 삶'은 내년 1월 19일까지 LG아트센터 유플러스 스테이지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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