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초 한 평론가는 윤 대통령에게 트라우마의 잔상이 보인다고 했다. 여당 정치인들 사이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주불사다’, ‘법사 위에 도사, 도사 위에 여사, 여사 위에 박사’라는 말이 은밀히 퍼지던 때다. 평론가는 윤 대통령 내외를 ‘누아르’와 ‘신파’의 주인공에 빗댔다. 윤 대통령 성패는 스스로를 극복하느냐에 달렸다면서다.
□‘영웅본색’으로 대표되는 홍콩 누아르의 주인공은 규범이나 도덕 기준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반(反)영웅적 인물이다. 숭고한 희생을 할 운명적 순간이 오기만 갈망한다. 자기파괴적 욕망이라고 한다. 평론가는 검사 출신인 윤 대통령 리더십의 뿌리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저우룬파(주윤발)가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신”이라고 한 영웅본색 대사와 비교했다. 대통령이 된 지금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같은, 기꺼이 희생할 순간만 찾고 있어 충동적이며 즉흥적인 국정운영이 지속될 걸로 봤다.
□심리학에서 자기파괴적 욕망과 얽혀 있는 건 메시아 콤플렉스다. ‘별들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신파에 잘 그려져 있다. 신파는 내면적 상처를 치유해주는 구원자이자 주변을 파멸로 이끄는 팜파탈이 극을 이끈다. 부도덕의 낙인을 두려워하며 남성성의 트라우마를 가진 남자를 치유하는 것으로 사회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 평론가는 윤 대통령이 누아르 주인공이라면 김건희 여사는 신파 주인공이라고 했다. 김 여사가 결혼으로 구제해주고, 대통령까지 만들었다고 말한 사실을 언급하면서다. 용산 사람들이 누가 대통령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던 때다.
□평론가가 예견한 대로일까. ‘영웅’이었던 윤 대통령이 3일 비상계엄 선포로 ‘본색’을 드러냈다. 숭고한 희생의 순간을 스스로 찾은 듯하다. 특별담화문에서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며 “신명을 바치겠다”고 했다. 학제 개편, 의대 정원 확대로 대혼란이 벌어졌을 때도 비슷했다. 누아르와 같았던 한밤의 비상계엄 선포는 날이 밝아 신파로 치닫는 모양새다. 비극의 희생자는 윤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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