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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노예, 보수정당

입력
2024.12.20 18:09
수정
2024.12.20 18: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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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헌정 질서는 합리적 근대 문명 결실
불법계엄은 반헌법·반역사·반문명 폭거
보수 가치와 지성, 철학 실종된 국민의힘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지난 14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한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지난 14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한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윤석열 대통령 1차 탄핵소추안 표결 때 뜬금없이 주목을 받은 이는 김상욱 국민의힘 의원이었다. 표결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허겁지겁 들어왔을 때 환호했던 이들은, 그가 당론 때문에 반대표를 던졌다고 했을 때 뜨악했다. 그를 조롱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나마 보수주의자다웠다. 다음 투표에선 찬성표를 던지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야권 지지자에겐 돌출적으로 보였을지라도, 그는 권력이나 당의 방침, 대세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행동했다. 무엇보다 비상계엄 조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보수주의자임을 입증했다. 이에 비해 젊은 보수 개혁 정치인으로 기대했던 김재섭, 김용태 의원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김 의원의 상식적 행동이 눈에 띈 것은 이번 불법계엄 사태 중 그가 국민의힘 의원 중 유일하게 87년 헌정 질서 수호를 보수주의의 기본 원칙으로 못 박았기 때문이다. 87년 체제는 한국 역사의 거스를 수 없는 성취이자 국민의 보편적 합의다. 민주주의 정치와 국민 기본권 확립은 단순한 제도적 변화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 가치를 내면화한 역사적 단절과 도약이었다. 어찌 보면 보편적 자유와 합리성을 주축으로 삼는 세계사적 근대 문명이 도달한 결실이다.

12·3 비상계엄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말단 장병들조차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무력으로 진압할 수 없다는 인식이 이미 몸에 배어 있어서였다. 광기의 대통령이 뒤집을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87년 체제의 문제점을 고쳐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지만, 이는 체제 내 수정 내지 개선이지 단절은 아니다.

이런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 한 윤 대통령은 오만과 아집의 세계에서 군림했던, 누구 말대로 장님 무사였다. 합리성의 근대 문명 자체를 뒤집는 배경이 된 것은 유튜브 등을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가는 음모론과 주술적 사고였다. 한국 보수와 진보에 두루 퍼져 있는 이런 악성 종양에 깊이 빠져 있었던 그를 잡종의 히드라라 치자.

기가 막힌 것은 국민의힘이다. 그래도 한국 보수의 가치를 대변하는 대표 정당이다. 108명 의원 중 몇몇을 빼면 이번 불법계엄 사태의 반헌법성, 반역사성, 반문명성의 엄중함을 직시한 이는 없다. 그들이 언급한 ‘탄핵 트라우마’는 그저 권력 유지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보수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가치와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도, 고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근대 문명이 도달한 우리 헌정 질서 합의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오직 왕당파나 군부 쿠데타, 전체주의, 공산주의 세력이나 반역할 뿐이다. 국민의힘이 윤 대통령을 옹호한 것은 그들 자신이 이런 세력의 하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결국 전두환의 정당, 민정당의 핏줄을 속이지 못한 것일까. 탄핵에 찬성한 의원들이 배신자가 아니라 바로 국민의힘이 국민을 배신했다.

봉건적 질서의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릴 때 지성을 갖춘 이는 모두 진보파였다. 하지만 보편적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의 근대 헌정 질서가 확립된 이후에는 학식을 갖춘 이들은 대개 보수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유 민주적 질서의 의미를 깊게 탐구하고 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포퓰리즘이나 반지성주의를 동반한 급진 좌파나 극우파들이 이 체제에 도전해왔다.

하지만 한국 보수는 이 질서의 수호자도, 도전자도 아니다. 그저 철학도, 가치도, 지성도 없는 권력의 노예라는 것이 이번 사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이런 보수로 인해 진보의 발전도 없다. 한국 정치의 불행한 운명이다.

송용창 정치국제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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