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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여성, '선물하는 연대'로 광장의 정치를 재발명하다

입력
2025.01.04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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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선결제 문화와 남태령 행렬을 만든 이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서한영교 작가가 격주로 글을 씁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들이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진 뒤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고 있다. 뉴스1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들이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진 뒤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고 있다. 뉴스1


그 보라색 민주주의자

에밀리 디킨슨 '보라색 클로버' 중

공동체라고 흔히 번역하는 코뮨(commune)의 어원은 선물(munis)을 나눈다(com)는 뜻을 갖고 있다.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준다는 시장주의적 상품 교환과 다르게 아무런 조건 없이 전해지는 게 선물이다. 선물을 나누며 함께(com) 살아가는 힘을 길러가는 선물의 공동체를 우리는 광장에서 체험하고 있다.

광장의 선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이 예정된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 커피전문점 직원이 시민들에게 '선결제' 커피 주문을 받고 있다. 류기찬 인턴기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이 예정된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 커피전문점 직원이 시민들에게 '선결제' 커피 주문을 받고 있다. 류기찬 인턴기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이 있던 날 서강대교를 건넜다. 국회 앞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발 뒤꿈치가 자꾸 밟혔다. 만나기로 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더디기만 했다. 가는 길에 어린이 반려자는 손에 보라색 풍선을 한 움큼 들고 있는 노동조합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길을 느낀 노동조합원은 손에 들고 있던 보라색 풍선을 어린이 반려자에게 쥐어주며 "함께 민주주의를 만들어 봐요, 어린이 동지"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광장의 정치는 어린이들에게도 민주주의의 동지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풍선을 손에 쥔 아이는 보라색으로 빵빵한 기쁨에 가득 찼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추위에 민주주의를 뺏길 수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외치며 약사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핫팩을 나눠줬다. 주머니에 하나씩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두둑히 챙겨줬다. 또 가다 보니 인형 탈을 쓴 사람들이 "달달한 민주주의 충전하세요"라며 초코바와 사탕, 쿠키가 담긴 간식 꾸러미를 나눠줬다. 동료들이 모인 곳까지 가는 동안 양손이 풍선, 핫팩, 간식, 브로치, 스티커들로 가득 넘쳐났다. 온갖 선물이 넘쳐 흐르는 광장을 지나며 쪼그라들었던 인류애가 다시금 두근두근 팽창했다.

선물의 광장

지난달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 집회 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커피차에서 무료 음료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 집회 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커피차에서 무료 음료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가는 길에 "탄핵 커피 드시고 가세요"라고 적힌 커피차에서 커피도 한 잔 받아 마시며 선결제 장소들이 업데이트된다는 '시위도 밥먹고'라는 웹사이트에 접속해봤다. 현장 주변 카페, 약국, 식당들이 빼곡했다. 해외에 사는 교민들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며 커피를 500잔 넘게 선결제해 두었단다. 커피가 가진 온기가 너무 뜨거워 입을 데일 뻔했다.

평상시였다면 5분이면 닿을 곳에 40분 넘게 걸려 드디어 도착했다. 동료들은 따뜻하게 우려낸 팔레스타인 홍차와 비건 간식을 꺼내줬다. 선물은 끝이 없었다. 한 동료에게 우리가 받은 온갖 선물들을 자랑했다. 그러자 휴대폰을 열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이거 봐. 좀 전에 화장실에서 찍은 사진이거든. 생리대, 휴대용 휴지, 핫팩, 생수, 상비약, 초코바들이 가득 쌓여 있었어. 놀랍지 않냐?" 광장은 거대한 선물의 공동체였다. 언론에서는 그저 훈훈한 이야기로 한 꼭지 소개될 뿐이었지만, 선물의 공동체는 광장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밑불이었다.

빛의 바다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 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에서 시민들이 한남동 대통령 관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 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에서 시민들이 한남동 대통령 관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물의 공동체는 국회·광화문 앞을 넘어 남태령까지 흘러넘쳤다. 전남 무안과 경남 진주에서 트랙터를 몰고 대통령 관저로 출발한 '전봉준 투쟁단'이 엿새 만에 도착한 남태령에서 경찰차벽에 막혀 대치 중이었다. 트랙터 창문을 깨고 강제진압에 나선 경찰의 폭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급속히 퍼지면서 응원봉을 든 행렬이 선물처럼 남태령으로 이어졌다. "난동 세력에게 몽둥이가 답"(윤상현)이라는 엄포에 맞서, 내란 세력에게는 응원봉이 답이었다.

"그들은 대개 젊거나 어린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모르는 노래가 없었고 지칠 줄 몰랐다". 품에서 꺼내 든 "응원봉이 바다를 이루었다. 바다 빛은 서로 다르면서 하나였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였고, 파란빛, 빨간빛, 노란빛"(전봉준투쟁단)이었다. 빛의 바다 속으로 피자, 떡볶이, 김밥이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전해졌다. 담요, 보조배터리, 상비약, 응원봉 건전지, 난방버스도 줄줄이 도착했다. 첩첩산중 남태령 언덕을 넘어 선물들이 흘러넘쳤다.

언덕을 넘어

지난달 21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서초구 남태령역에 쏟아진 기부 물품들. 엑스(X) 캡처

지난달 21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서초구 남태령역에 쏟아진 기부 물품들. 엑스(X) 캡처

'남태령 대첩' 이후로 선물의 연대는 넘쳐흘렀다. 노동자 전문 병원을 짓기 위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추진위원회로 모금이 쏟아졌고, 740일 넘게 지하철 선전전을 이어오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향한 연대 투쟁이 이뤄졌다. 사측으로부터 470억 원 넘는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을 향한 파업 기금도 쏟아졌다. 또 352일째 고공농성 중인 옵티컬하이테크지회 여성 해고 노동자를 향한 생수 연대, 여성농민생산자협동조합 '언니네 텃밭' 회원 가입으로 연대의 행렬이 흘렀다. 이밖에도 셀 수 없는 선물의 연대가 쏟아졌다.

서로 선물을 나누고 응원하며, 2030 여성들은 '우리'라는 공동의 삶을 생산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구체적 예시들을 알록달록하게 증명하고 있다. 2030 여성들은 우리에게 응원봉이라는 불빛과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선물했고, 누구나 안전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광장 속 민주주의를 선물했다.

우리를 넘어

지난해 9월 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여성·인권·시민단체 회원들이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 대응 긴급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9월 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여성·인권·시민단체 회원들이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 대응 긴급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나라는 2030 여성을 버렸지만 2030 여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남태령 자유발언자)

지난 10년간 2030 여성들은 선명한 폭력의 예감을 축적해왔다. 여성혐오 살인, 스토킹 범죄, 불법촬영물, N번방, 딥페이크를 겪었지만 국가는 제대로 된 대책 하나 내놓지 않았다. 버림 받았고 내팽개쳐졌다는 감각, 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예감으로 첨예하게 몸과 마음을 훈련할 수밖에 없었던 2030 여성들은 국가의 폭력에 가장 기민하게 응답했다.

이들은 지속적인 폭력을 끝까지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부르고자 하는 국가 권력에 맞서 여성혐오 살인으로 고쳐 불렀다. 끈질긴 남성의 로맨스로만 치부하던 경찰 권력에 맞서 스토킹 범죄로 다시 썼다. 화장실 '몰카' 정도로만 여기던 시선 권력에 맞서 불법 촬영물로 불렀고, N번방 '음란물 사태'로 말을 더럽히던 남초 권력에 맞서 디지털 성착취물로 바꿔 불렀다. 2030 여성들은 온라인과 강남역-혜화역-사당역을 거치며 가부장적 문법에 맞서 정치적 주체로서 단련했다. 그러면서 가방 안에 있는 먹거리와 생리대와 핸드크림을 나누고, 그와 함께 안부를 나누고, 일상 속 폭력의 예감을 나누며 공통의 감각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쌓아온 힘으로 국회의사당역-광화문역-남태령역을 휩쓸며 '우리'라는 문법 자체를 바꾸고 있다.

재발명되는 우리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앞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메리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다시 만들 세계'에서 시민들이 손 피켓과 응원봉을 들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앞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메리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다시 만들 세계'에서 시민들이 손 피켓과 응원봉을 들고 있다. 뉴시스

우리는 전에 본 적 없는 '우리' 라는 사건을 겪고 있다. 광장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다수의 민주주의였다.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노인, 도시빈민, 이주민 등은 그동안 '나중에'라며 늘 밀려났다. 함께하고 싶지 않은 비정상-비규범-비시민은 '우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2030 여성들은 우리에 포함되지 않던 무리들과 정의로운 관계를 맺어나가는 새로운 '우리'를 재발명해내고 있다.

이들은 동일한 '우리'라는 보편의 언덕을 넘어 서로 다른 관계의 광장을 재발명하고 있다. 다양성을 무책임하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경청하며 응답해나가는 '관계의 정치'를 재발명하고 있다. 2030 여성들은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현재"(리베카 솔닛)를 이끌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이 재발명한 '우리'를 선물받는 중이다.

무지개떡과 투쟁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 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에서 트랙터 이동을 통제하던 경찰 버스가 철수하자 트랙터들이 이동을 재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 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에서 트랙터 이동을 통제하던 경찰 버스가 철수하자 트랙터들이 이동을 재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농민들만 있었으면 다 연행되거나 더 무자비한 탄압이 있었을 것인데, 20대 여성 분들이 지켜줘서 정말 아주 감동이었습니다." (전봉준투쟁단)

무지개 불빛을 선물받은 전봉준투쟁단은 1만 개의 무지개떡을 준비해 광장의 모든 사람에게 다시 선물했다. 무지개떡은 광장의 간식으로 딱이었다. 무지개떡에는 "'우리'의 힘으로 함께 만든 '남태령 대첩'.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라는 스티커 편지가 붙었다. 농민들은 '우리'라는 추상적 공동체를 표상하는 구체적 예시로 '무지개'를 딱 찍어 택했다.

조건 없이 서로에게 건네는 선물의 자리에서 몸과 마음들이 투쟁 속에서 반짝인다. 존재 자체가 선물이라는 것을 광장의 2030 여성들에게서 배운다. 이젠 투쟁이라는 말이 반짝거리고 있다. 이 세계를 열렬히 사랑하는 방법으로서의 투쟁!

무리 가운데 – 가장 용감한 자

에밀리 디킨슨 '보라색 클로버' 중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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