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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 차별당해도 좋은 경험 한 번이면 된다"... 목발 짚고 밥 짓는 이유

입력
2025.01.04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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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목발과 오븐'

장애인권운동가 김형수씨가 서울 은평구의 자택에서 최근 펴낸 에세이집 '목발과 오븐'을 들어보이고 있다. 최주연 기자

장애인권운동가 김형수씨가 서울 은평구의 자택에서 최근 펴낸 에세이집 '목발과 오븐'을 들어보이고 있다. 최주연 기자

"어머니와 나는 두 시간을 서 있었지만 택시는 손사래를 치며 우리를 태우지 않았다."

장애인권운동가 김형수(50)씨가 최근 펴낸 책 '목발과 오븐'은 40년 전 한 일화로 시작된다. 뇌병변 장애로 거동이 불편한 김씨는 당시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엄마 손을 잡고 부산 연제구 거제동 큰길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결국 그날 친척 모임에 가지 못했다. 택시 기사들이 마수걸이 손님으로 안경잡이, 여성, 장애인은 태우지 않던 때다. 김씨는 승차 거부에 익숙해져야 했다.

휠체어 태우지 않는 지하철

사회는 바뀌지 않았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 2일에도 장애인 이동 권리를 주장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탑승을 막아섰다. 지하철은 휠체어를 태우지 않고 내달렸다. 빠르게 지나간 지하철 승강장에는 "아무리 짓밟고 막을지라도 함께 살자는 권리의 목소리는 멈출 수 없다"는 시민들의 외침만 울렸다.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이도 있다. 김씨는 "시위로 사람들이 짜증도 날 거고 (장애인들이) 밖으로 안 나왔으면 싶기도 하겠지만 장애인들도 '같이 지하철 타는 사람'으로까지는 온 거다"라며 "시민들이 일상에서 장애 문제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짚었다.

'목발과 오븐'을 쓴 김형수씨는 "식당에 가면 재수 없다고 소금을 맞더라도 '내 편 들어주는 사람'들의 정서적 지지가 있어 장애로 인한 힘듦이 많이 소거됐다"고 했다. 최주연 기자

'목발과 오븐'을 쓴 김형수씨는 "식당에 가면 재수 없다고 소금을 맞더라도 '내 편 들어주는 사람'들의 정서적 지지가 있어 장애로 인한 힘듦이 많이 소거됐다"고 했다. 최주연 기자


"이놈의 학교, 힘들어서 못 다니겠다"

2일 앵봉산 자락 서울 은평구 구산동의 한 아파트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대표로 있는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의 사무실이자 그의 보금자리다. 장애인권운동가로서 그는 이미 유명 인사다. 그는 특수교육대상자 특별전형이 처음 실시된 1995년,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학내에는 경사로는커녕 장애인 화장실이 없어 오줌통을 들고 수업을 들어야 했다. 목발을 짚고는 통과할 수 없는 삼발이 게이트 때문에 그는 재학 내내 중앙도서관을 한 번도 이용하지 못했다.

"이놈의 학교, 이대로 다니다간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 뭐라도 해보자." 심리학과에 입학했던 시각장애인 후배가 자퇴했다는 소식에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휠체어 타는 동기와 함께 1996년 국내 최초의 장애인권동아리 '게르니카'를 결성했다. 대학 4학년 때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이화여대생 5명과 함께 군가산점제 헌법소원을 청구해 1999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받아 냈다. 군필이 될 수 없는 장애인 남성과 여성이 연대해 이룬 성과였다.

목발과 오븐·김형수 지음·한뼘책방 발행·224쪽·1만7,000원

목발과 오븐·김형수 지음·한뼘책방 발행·224쪽·1만7,000원

그의 장애인권 운동은 1990년대 중반 캠퍼스에 등장한 '영 페미니스트'나 성소수자 등 진보적 사회 운동의 바람을 탔다. 총여학생회 소속 여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게르니카의 요구사항을 현수막에 써서 걸고, 서명전에도 나서줬다. 성소수자 모임 '컴투게더'는 '동성애'를 '장애인'으로 바꿔 적은 입간판과 자보판을 모두 게르니카에 넘겼다. "당사자도 아닌데 왜 비장애인들이 우리보다 더 열심이지? 왜 화를 내지? 이런 충격도 좀 있었어요. 한번은 직접 물어도 봤어요. '휠체어 들어주기 싫어서 그런 거야. 내 허리를 위해 싸운다'는 답이 돌아왔죠. 우리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은 대학생으로서 연대의식이었던 거죠."

서장훈도 고맙다...연대와 저항

'목발과 오븐'은 장애인권운동사 주요 사건의 조각이 아닌 오롯이 김씨가 주인공인 책이다. 한 학번 위 직속 선배였던 이효진 한뼘책방 편집자의 속을 태운 끝에 4년 만에 써낸 에세이다. 한 달을 고민한 제목의 '목발'은 의지가 필요한 다양한 정체성을, '오븐'은 함께 음식을 나누며 연대하고 저항하자는 의지를 뜻한다.


김형수씨가 요리를 하기 위해 오븐에 닭고기를 넣고 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혐오에 지쳐 갈수록 혼자 밥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자주 지인을 불러 직접 만든 따뜻한 음식을 대접한다. 최주연 기자

김형수씨가 요리를 하기 위해 오븐에 닭고기를 넣고 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혐오에 지쳐 갈수록 혼자 밥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자주 지인을 불러 직접 만든 따뜻한 음식을 대접한다. 최주연 기자

대학 입학 이후 25년간 살던 신촌을 떠나 2021년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그는 제일 먼저 주방에 4구짜리 가스레인지를 넣었다. 요리할 때 중요한 건 화력이니까. 오븐은 빌트인.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직접 밥을 지어 먹인다. "사실은 고독사 방지용입니다. 하하."

"여전히 장애인의 삶은 힘든데 너무 밝은 얘기만 썼나" 반성했을 정도로 책에는 그를 도운 귀인들로 넘쳐난다. '학교는 학생을 골라 받지 않는다'며 그를 받아들였던 부산 동래초 오승희 선생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를 소개해준 초등 4학년 때의 벗 제민준, 기숙사 올라가는 길에 늘 봉고를 태워줬던 당시 연대 농구선수 서장훈도 나온다. "차별과 설움을 100번 당해도 좋은 경험 1번은 합니다. 우리가 더 기록해야 될 건 뭐죠? 나쁜 사람 때문에 좋은 사람을 지우면 차별한 사람만 승리감에 도취하지 않겠어요?"

문화의 힘을 믿는 그는 영화감독을 꿈꾼다. "장애인이 쓴 책, 장애인 감독이 만든 영화, 장애인이 나오는 콘텐츠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앞서가는 사람이 문 잡아주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 1이나 악역으로 장애인이 등장하는 콘텐츠부터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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