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버블·불황, 정책의 역설
기후위기와 재정 압박에 명나라 몰락
기후 충격에도 산업국가는 성장 지속
과잉투자 청산과 정부 긴축이 불황 심화
미에노 총재의 강경책, 30년 침체 서막
편집자주
국내 대표 이코노미스트인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가 세계 경제의 흐름과 현안을 진단하는 ‘홍춘욱의 경제 지평선’을 3주에 1회 연재합니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만력제의 무덤이었다. 명나라 황제 13명의 무덤 중 만력제와 그의 두 부인이 묻힌 정릉이 유일하게 발굴됐기 때문이었다. 정릉에는 만력제의 시신이 없고 남겨진 유물도 얼마 되지 않는다. 1966년 8월 24일, 홍위병이 몰려와 발굴 유물을 훼손하고 만력제와 두 황후의 시신을 불태웠다. 홍위병들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만력제가 명나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어리석은 군주로 지주 계급의 상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한 입장에서 볼 때, 만력제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의 티모시 브룩 교수는 명나라의 멸망 원인을 기후 변화에서 찾는다. 만력제 집권 초반에 발생한 1586~1588년의 기후 위기는 넉넉한 재정을 활용해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1615년, 두 번째 기후 충격이 발생하자 명나라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유달리 추운 겨울에 이어 가뭄이 닥치자, 기근은 북부에서 양쯔강 유역으로 파급됐고, 메뚜기 떼의 약탈이 시작됐다.
산업혁명 이후, 기후 변화에 따른 경기 변동은 사라졌다. 대표적 예는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이다. 지난 2,000년 이래 규모가 가장 큰 화산 폭발로, 1816년 서유럽과 미국은 여름이 없던 해라고 불릴 정도의 흉년을 겪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등 산업혁명이 시작된 나라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증기기관 발명을 계기로 경쟁자보다 훨씬 싼값에 섬유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에, 추운 겨울은 새로운 시장의 출현을 의미했다. 1815~1824년 영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56%로, 1805~1814년의 1.52%를 훌쩍 뛰어넘는다. 생산성 향상이 지속되는 근대사회에서 기후 변화는 일시적인 충격을 미칠 뿐, 만력제 때 같은 심각한 위기를 유발하기 힘들었다.
1. 근대 사회에서 장기 불황이 출현하는 원인은
이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산업혁명 이후에는 장기 불황이 없다는 이야기냐'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강력한 생산성의 향상으로 만성적인 기아를 경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대신 과잉 공급 상황이 빚어지는 게 문제다.
불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간명한 답은 '기업과 가계가 함께 절제의 미덕을 되찾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업들의 투자 감소는 고용 부진을 유발하며, 가계의 소비 축소는 기업들의 매출 감소로 이어진다. 불황이 발생하면 연쇄적 악순환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누군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 저렴한 장비와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 혁신적인 기업가가 그 역할을 맡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경제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결국 정부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929년 미국, 1990년 일본은 선진 산업국가가 장기 불황의 늪에 빠져 든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2. 1929년 대공황, 정부마저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다
1929년 말, 주식시장 붕괴 전까지 미국 경제는 놀라운 성취를 기록하고 있었다. 포드가 출시한 'T형' 자동차가 1,000만 대 이상 팔리는 등 대중 소비사회가 열린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식가격이 급하게 오르는 과정에서 레버리지 투자가 늘어난 게 문제였다.
레버리지 투자의 장점은 부채 덕분에 실질적인 투자 수익률이 크게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하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이 지켜보고 있을 리 없다. 차입금을 상환하지 못할 정도의 주가 폭락을 겪을 때, ‘마진콜(Margin Call)’이 발생한다. 마진콜이란 말 그대로 ‘추가적인 담보 주식이나 현금을 예치하지 않는 한, 강제로 보유 주식을 매도해 대출을 회수하겠다’는 통보를 의미한다. 레버리지 투자가 급격히 증가한 상황에서 주가가 하락하면 연쇄적인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런 일이 1929년 미국 주식시장에서 대규모로 벌어졌다. 1924년 말 레버리지 투자 규모는 22억3,000달러에 불과했으나, 1927년 말에는 44억3,000달러로, 그리고 1929년 10월 4일 대공황 직전에는 85억 달러로 불어났다. 1929년 미국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1,000억 달러 수준이었으니 이미 8%가 넘는 자산이 주식 투자와 연관된 빚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주식가격이 폭락할 때 연쇄적인 마진콜이 발생하고, 이게 다시 금융기관의 연쇄적인 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주였다.
미국 정부는 일체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하고, 현금을 인출할 목적으로 끝없는 행렬이 줄을 섰음에도 정부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았다. 정부의 GDP 대비 재정수지는 1930년 말까지 흑자를 기록할 정도였다. 1930년 미국 경제가 마이너스 11.8% 성장하며 조세수입이 급격히 줄어들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정부 지출도 급격히 줄어들었던 것이다.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당시 가장 지지를 받았던 이론, 즉 청산주의(liquidationist theory)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1920년대가 지나친 호시절이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과잉의 시기를 경험했으면 이제 필요한 것은 디플레이션의 시기, 모든 과잉을 짜내는 시기가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재임 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앤드루 멜런은 "노동자를 청산하라, 주식을 청산하라, 농민을 청산하라, 부동산을 청산하라!"라고 외쳤다.
이 입장에서 본다면 주식 투기꾼들에게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망하는 것은 경제 전체를 위해선 좋은 일이다. 놀라운 의견처럼 보이지만, 위대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인위적인 부양책에만 의존해 경제를 회생시키면 불황이 마땅히 했어야 할 작업이 제대로 완수되지 못하며, 실패자들이 청산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며 정부의 개입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을 레버리지 투자의 청산과 정부의 긴축정책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금본위제(화폐 가치가 금과 연동되는 통화제도) 및 관세전쟁 등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 정부가 금융시장의 붕괴가 실물경제의 위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손을 놓음으로써 불황을 키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된다.
3. 일본은행 총재, 지가(地價) 20% 하락에 환호하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케인스 경제학이 대두되면서 불황에 대한 정부의 접근방법도 달라졌다. 경기하강이 시작되고 실업률이 치솟을 때, 금리를 인하하고 정부 지출을 늘려 신속하게 불황에서 탈출시키는 일종의 매뉴얼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989년 일본은 예외였다.
도쿄 23구를 팔아 미국 국토 전체를 사들일 수 있고, 지요다구 중심에 위치한 교코(皇居)에 건물을 짓는 것만으로 캐나다 국토 전체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자산가격이 부풀어 오르자 대장성(한국의 기획재정부 역할)과 일본은행이 칼을 뽑아 들었다. 정책금리를 2.5%에서 6.0%까지 인상한 것이다. 더 나아가 대장성은 1991년 말까지 부동산 대출이 총 대출보다 더 빠르게 증가해서는 안 된다는 행정 지침을 내림으로써, 금리 인상에 화답하는 행동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공격적인 금리 인상, 1990년 4월 발생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까지 겹치면서 일본의 자본시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러나 일본은행의 미에노 야스시(三重野) 총재는 토지 가격의 20% 하락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토지 가격 상승이 '손쉬운 부'를 창출해 일본 특유의 열심히 일하는 문화를 해칠 수 있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이 뒤에 발생한 일은 1929년 미국과 판박이다. 돈을 빌려준 은행들은 담보가치가 급락하면서 부실 대출이 급증했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동시에 하락하면서 은행들이 대출 회수에 나섰고, 기업과 가계는 빚을 갚기 위해 투자와 소비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은행 자산의 상당 부분이 주식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주가 하락은 곧 은행 자기자본의 감소로 이어졌다. 일본의 은행들은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는 대신 장기 대출을 해주는 식으로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해 왔는데, 주가 폭락으로 메인뱅크 시스템의 약점이 극명하게 노출됐던 것이다.
2012년부터 아베노믹스, 즉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공격적인 통화공급 확대 정책이 진행 중임에도 정책금리의 인상이 쉽지 않다. 30년의 장기침체로 성장의 잠재력이 고갈된 데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에 올라타려는 스타트업이 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1조 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비상장기업, 즉 유니콘 기업의 숫자가 단 8개에 불과한 데 인구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국의 유니콘이 14개라는 점에서 일본 경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4. 앤드루 멜런, 미에노 야스시만의 문제일까?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산업국가가 장기불황에 빠져드는 일은 정책 당국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발생하는 것 같다. 1929년 앤드루 멜런 장관, 그리고 1989년 미에노 야스시 총재 같은 이들이 “경제의 버블을 일소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는 순간 장기 불황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물론 이들을 뒷받침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했었기에, 이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일거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이들에게 청산주의자들의 해법이 신선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부디 제2의 미에노 총재를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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