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도 김갑녀씨의 평범하지 않은 졸업장>
동생 돌보고 일하느라 초교 1학년 때 자퇴
딸 다섯 키우며 시장, 공장, 세신사로 노동
여든에 다시 들어간 학교…"공부가 즐거워"

여든이 넘어 고등학교에 입학한 김갑녀씨가 지난해 10월 예능 프로그램인 tvN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모습. tvN 캡처
남들은 열여섯 살에 들어가는 고등학교를 여든다섯이 돼 입학했다. 시장에서, 공장에서, 목욕탕에서 닥치는 대로 일하며 다섯 자매를 홀로 키우다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어렵게 공부했지만 학창시절에 남은 기억은 즐거움뿐이다.
'만학도 학교'인 서울 일성여고 최고령인 3학년 5반 김갑녀(87) 학생은 25일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평범하지 않은 졸업장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난 김씨는 해방되던 1945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며 학교를 그만두도록 했다. 동생들을 돌보며 밭일 등을 하다보니 10대 시절이 거의 다 지났다. 열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편이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김씨에게 "시집을 가라"고 했다. 그 말이 싫어 친구를 따라 부산으로 가출해 찾아간 곳이 국제시장이었다. 그곳 신발가게에서 1년간 식모살이를 하다가 주인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왔다.
김씨는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딸을 다섯 낳았다. 명함 있는 직업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고된 노동을 멈춘 적이 거의 없었다. 서울 광장시장, 과자 공장, 김치 공장 등에서 일하며 아이들을 억척스럽게 키웠다. 특히 남편이 15년간 투병하다 김씨가 마흔일곱 되던 해에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홀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그때부터 시작한 목욕탕 세신사 일을 23년이나 했다. '여기서 못 버티면 내 새끼들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여든이 되던 해, 김씨는 초등학생이 됐다. 지인의 소개로 공부의 때를 놓친 학생들이 다니는 서울 양원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처음에는 '평생 못 읽은 한글이라도 읽고 써보자'는 심정이었다. 막상 공부를 해보니 말 못할 즐거움을 느꼈다. 4년 만에 초교를 졸업하고 일성여중을 거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씨는 1시간 넘게 걸리는 등굣길이 늘 행복했다고 한다. 학교에 가려고 책가방을 메면 열아홉 살쯤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늦게 사귄 친구들과 교실에서 수다 떠는 재미도 있었다. "떠돌이 인생을 살다 보니 친구가 없었다"던 그는 초등학교에서 만난 친구 10명과 요즘도 매달 한 번씩 만날 만큼 각별하다.

김갑녀씨가 25일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일성여중고 졸업식에서 한복을 입은 채 앉아 있다. 유대근 기자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역사… 겹받침은 아직도 어려워"
김씨는 10대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것과 똑같은 교과 과정을 배웠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어려운 과목은 수학과 영어. 반면 역사와 국어는 배우는 맛이 있었다. 그는 "예전에는 조선시대를 다룬 영화나 사극을 봐도 그런가보다 했는데 요즘은 역사를 알고 보니 이해가 더 잘 돼 2배로 재밌다"고 했다. 반면 국어는 아직도 맞춤법이 헷갈린다. 특히 'ㄺ', 'ㅀ' 같은 겹받침은 복습을 거듭해도 어렵다고 털어놨다. 3학년 담임이었던 강래경 교사는 "갑녀씨는 숙제를 빼먹은 적도 없고 결석도 거의 하지 않는 모범생"이라고 설명했다. 성격도 살갑다. 덕분에 졸업장과 함께 끈기상과 애교상도 받게 됐다.
늦게 공부한 김씨는 우연한 계기에 지난해 10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tvN의 '유퀴즈온더블럭'에도 출연했다. 그는 "학교에 입학하면서 인생이 폈다"며 활짝 웃었다.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딸들도 엄마를 자랑스러워한다.
김씨는 다음 달부터 대학생이 된다. 숙명여대 평생교육원 사회복지과에 입학해 공부하게 됐다. 동아리 활동 등 캠퍼스에서 쌓을 추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고 했다. 김씨에게 공부를 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느냐고 물었다.
"목표? 그런 건 없어요. 그냥 즐거워요. 사람들과 어울려 배운다는 것이."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