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라는 말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다소 허황한 의미를 가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특히 젊은이들을 피 끓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꿈이 있는 청년은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그래서 지금의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데 그치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라도 청년들이 꿈이 있는 나라는 힘이 있는 나라가 된다. 경제개발 당시의 한국은 가난했지만 청년들의 꿈이 넘쳐나는 나라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꿈들이 하찮은 수준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어쭙잖은 꿈들을 안고 우리는 앞을 향해 뛸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두 차례 방문했을 때마다 느낀 점은 이 나라 청년들이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미래의 삶이 국가에 의해 보장되어 있지만 자신을 계발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나라이기에 앞을 향해 뛰는 청년들의 힘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래를 개척해 가려는 꿈을 꾸는 청년들이 적어지는 것 같아서 모두 걱정이다. 청년들이 꿈을 꾸지 않는 것이 그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국가나 기성세대의 잘못일까. 필자는 후자에 방점을 찍고 싶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온 선배들의 기개를 본받지 못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산업화 세대들은 청년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 그 속에는 필자도 포함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저 열심히 일하면 내가 살 길이 보이던 산업화 세대와는 달리 그렇게 열심히 일할 기회조차 확연히 줄어든 청년 세대들에게 기성세대와 같이 행동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억지로 느껴진다.
반면에 이른바 ‘흙수저 금수저론’을 들먹이며 이 사회의 모든 것이 기존 이해집단에 의해 결정되어 있고 청년들이 그것을 뚫고 성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몰아가는 사람들도 책임이 크다.
지난 주 충남에서 한ㆍ중ㆍ일 지식인들이 모여 벌인 ‘환황해포럼’에서 필자의 머리를 가장 강하게 때린 발제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김홍중 교수의 ‘꿈-자본, 그리고 ‘다른’ 미래의 생성’이었다. 김 교수는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이 많으면 그 미래가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그저 지금 생활에 적응하기에 급급한 청년들이 많으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오지 못하고 그 결과로 우리 사회는 정체하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청년들에게 꿈을 꾸게 하려면 우리 기성세대가 문을 열어야 한다. 그들에게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는 꿈을 주고 그들이 미래 세상의 주인이라는 분명한 사명감을 주어야 한다. 이 정부 들어서 한때 청년들에게 ‘나라 밖에서 찾아라.’라고 했을 때 ‘너나 가세요’라는 반응이 나온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이미 글로벌화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나라 밖에서 더 많은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많은 청년이 나라 밖에서 취업도 하고 창업도 한 뉴스가 뜨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청년들이 뛸 주 무대는 나라 안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 안에서 청년들이 꿈을 꿀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결국 현재 이 나라를 그리고 이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려고만 하지 말고, 청년들이 커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공공이든 민간이든 턱없이 높기만 한 채용의 벽을 통과한 청년들만 자신들의 식구라고 감싸고 자신들 세계의 밖에 있는 청년들에게는 문을 전혀 열어주지 않는 환경부터 바꾸어야 한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비록 지금은 바로 쓰기에 미흡한 수준의 청년들이라도 꿈이 있는 경우에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다. 결국 이 나라의 미래는 이들이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김도훈 경희대 국제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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