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역사는 의미부여의 역사다. 무릇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차적 주체는 노동자다. 그러나 어느 시대의 노동이건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율된다. 그만큼 의미부여 과정에는 국가나 자본과 같은 타자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어원을 탐색한 노르웨이 철학자 스벤젠에 따르면, 프랑스어의 노동인 travail은 고문도구를 뜻하는 라틴어 tripalium에서 왔고, 그리스어 ponos는 슬픔, 라틴어 labor와 독일어 Arbeit는 고생과 역경을 뜻한다(‘노동이란 무엇인가’‧파이카). 어원만으로 노동의 본질적 의미를 노예의 고역이라 단정해선 안 된다. 노예가 노동을 담당하던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본제 생산양식에 고유한 임금노동의 의미 역시 이데올로기의 대상이었다, 사상적 근원에만 주목하면, 마르크스와 베버의 대결로 요약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노동은 이중의미를 지닌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노동은 목적의식적 활동이다. 가치의 근원이며 자신과 세계를 변혁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자본과의 관계(생산관계)에서 노동은 착취되고 소외되는 대상화된 상품이다. 노동자의 목적의식성은 자본의 지시와 통제로 대체되며 노동과정은 빼앗길 잉여를 생산하는 낯선 것으로 전락한다. 마르크스는 타인에 종속된 소외노동의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해방돼야 할 노동에 방점을 둔 실천적 의미를 역설했다.
반면 자본주의를 합리성 발달의 산물로 파악한 베버는 물적 토대보다는 정신(상부구조)에 초점을 둠으로써 임금노동의 또 다른 측면을 포착한다. 그에게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주의 발전의 지주다. ‘높은 책임감과 적절한 마음가짐(베버)’을 갖는 노동자의 재생산이 그 핵심이거니와 훈육의 필요성에 대해 베버는 이렇게 썼다.“마치 노동이 절대적 자기 목적 – Beruf 즉 천직-인 것처럼 일에 매진하는 심정이 필요하다. 이는 인간이 천부적으로 지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오랜 교육(훈육)의 성과로 비로소 탄생한다”(‘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 동서문화사).
이후 노동운동은 소외노동의 극복에, 자본은 노동자에게 근로의 심정을 내장하는 데 매진해왔다. 지금의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자본의 시도는 꽤 성공적이다. 인사관리전략을 동원해 노동자를 ‘인적 자원’으로 호명하고 일부를 핵심인재로 등용했다. 자율성을 부여하고 높은 보상을 제공했다. 설사 자본에 의해 제한된 자율이라 해도 수많은 노동자는 이를 수용했고 스스로 조직인의 정체성을 내면화했다. 나머지 주변노동은 핵심인재의 하위에 위치시킴으로써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계급구성을 완성했다.
반면 노동운동은 소외노동 극복을 위한 대항 이념 창출에 실패했다. ‘신성한 노동’이라는, 노동운동에 꽤 자주 등장한 구호는 자연과 관계하는 노동의 의미를 설명하기에는 합당할지 몰라도 생산관계의 전복과 노동자의 연대를 요청하기엔 추상적이고 무력했다. 출처도 불분명한 이 신화는 외려 파시즘에 의해 이용당하기도 했고 – 아우슈비츠의 정문에는 ‘노동이 너희를 신성케 하리라’는 주문이 걸려있었다 – 자본에 의해 근면 노동의 근거로도 활용됐다. 주변노동 확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기획과 전략은 부재했다. 겨우 제한된 일자리와 자본에게서 양보 받은 경제적 부를 유지하는 정도로 신화의 달성을 갈음했을 뿐이다.
개헌 논의가 시작됐다. 근로자를 노동자로 대체하고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 원칙에 합당한 노력 의무를 부과하는 등 지연된 근대적 과제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근로’에 담긴 지배-종속의 역사를 삭제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가치 선언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수많은 노동자는 이미 근로자임을 거부하고 주체로서 노동하는 삶을 살아왔을 터다. 지체된 것은 노동운동의 인식과 역량이다. 심화되는 소외와 종속, 파편적 분할을 극복할 연대의 전략과 역량이 없이는 그리 진보적이지 않은 근대적 과제마저도 완수를 기대하기 어렵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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