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 관계를 연구하면서 답답한 점이 하나 있다. 우리가 공산주의 국가 행위에 무지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공산주의를 배웠으나 정작 공산국가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배우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ㆍ개방으로 포장된 중국을 보통국가와 동일시한다. 북한의 화해 손길은 우리의 민족 정서를 자극해 동반자로 착각하게 한다. 명백한 사실은 이들이 현재 공산주의 실현을 최종 목표로 사회주의 단계라는 과도기를 겪는 나라다. 이들이 표방하는 사회주의도 서구식 사회주의가 아니다. 북중은 엄연한 공산국가들이다.
북한과 중국은 당이 국가 상위 주체로 존재하는 ‘당-국가’ 체제의 국가들이다. 당이 국가를 포함해 모든 사회 구성원을 영도하는 지배구조를 가진 나라다. 외교에서는 북중의 공산당관계가 국가관계를 지배한다는 의미다. 두 당 간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가관계는 소원해질 수 있다. 소원해진 국가관계는 당지도부의 의사로 쉽게 복귀된다. 공산국가의 외교는 국가 간의 관계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 구조를 모른 채 우리는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국가 관계로 언급했다 해서 그렇게 믿었다. 그러면서 북중 관계가 국가차원에서 소원해지자 우리 외교의 공간과 입지가 상대적으로 확장되었다고 믿었다. 역사적으로 유사한 판단 착오의 사례는 많았다. 미국도 중소관계를 같은 맥락에서 오판한 적이 있었다. 공산국가 간의 외교를 서구식 국제관계의 논리로 이해하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지난 1일 우리의 평양공연 예술단이 ‘봄이 온다’라는 테마로 평양에서 13년 만에 공연을 가졌다. 평창올림픽 이후 한반도 정세의 긴장 완화를 상징하는 무대였다. 그러나 ‘한반도의 봄’은 전지구적 이상 기후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입장이 선명하게 번복되고 중국의 농락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3월 5일 우리의 대북 고위 특사단에게 김정은은 비핵화 할 용의를 전하면서 남북과 북미 대화 개최 분위기를 연출했다. 며칠 뒤 그의 입장은 조건부로 바뀌었다. 28일 김정은은 방중 중에 시진핑 주석에게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고 했으나 비핵화 문제의 단계적 해결과 한국과 미국의 책임론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지난번 칼럼에서 필자는 중국이 우리에게 러브 콜을 보낼 것이라 했다. 동인은 달랐으나 메시지는 같았다. 김정은의 방중으로 차이나 패싱에 대한 우려가 아닌 중국의 존재감과 역할론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 중국은 우리의 긴밀한 공조와 협의 제안에 마치 호의를 베풀 듯 3월 29일 사드(THAAD) 보복조치의 조속한 해제를 약속했다. 이는 작년 4월 이들이 주장한 사드 보복이 중국 정부의 결정이 아닌 중국인의 자발적 행동이 거짓임을 증명했다.
김정은의 갑작스런 방중 결심은 고사하고 북중의 모순적 언행이 우리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의 실체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공산국가의 외교행태를 명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농락당하기 쉽다. 공산국가 간의 소원한 관계는 당이 의기투합하고 당 지도자가 만나면 하루아침에 복원된다. 50년대부터 유지된 패턴이다. 북중 관계가 정상회담 없이 장기간 소원해졌을 때 김일성(1958, 1969, 1982, 1989)의 방중으로 한 순간에 회복됐다. 1992년 한중 수교로 소원해진 관계도 김영남 최고인민대표회의 위원장의 방중으로 정상화했다.
이들 공산국가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오판을 낳는다. 오판으로 인한 잘못된 결정과 행동은 국가 외교를 함정에 빠뜨린다. 그러므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면 인내를 가지고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중국은 북한의 도발 자제와 민생을 빌미로 제재의 완화와 평화협정 등의 공을 한미 양국에 넘길 태세다. 두 나라는 단계적 비핵화를 주장할 것이다. 북중의 유기적 단합에 유기적 대응이 필요하다. 관용은 금물이다.
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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