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을 산책할 때는 도서관 옆에 있는 평화동산에 들른다. 그 곳에 책을 펴들고 벤치에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한 고 이수병 선생의 추모 동상이 있다. 그의 약력이 기재된 비석에는 “1975. 4. 9.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이라고 적혀 있다.
이수병은 1961년 5월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로 나서 ‘남북학생회담을 환영한다!’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고 외쳤다. 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과 협박을 당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되었다.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이수병,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에 대하여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이라는 호소를 외면하고 사형판결을 확정했다. 다음 날 새벽 박정희 정권은 판결 선고된 지 18시간 만에 8인 전원을 사형시켰다. 그래서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한다. 이 사실을 모른 가족들은 아침에 면회를 하려고 서울구치소로 갔다가 사형집행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유신정권은 판사들의 적극적 협조로 유지되다가 종말을 맞았다.
새 시대가 되자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에 대한 재심이 개시됐다. 이수병을 비롯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은 2007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사형당한 지 32년 만이다. 재심개시 결정문은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보일러실 등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과 파견 경찰관들로부터 몽둥이(야전침대봉) 등으로 구타를 당하고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는 등 폭행과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일찍이 무죄로 석방되었어야 할 분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에 무죄판결이 나왔다.
그럼 지금은 중앙정보부 후신 국가정보원은 사건조작을 하지 않는 기관으로 변화됐는가? 대법원은 2015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으로 기소된 유우성(당시 35세)의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국정원이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 대공수사국장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지금도 무고한 자를 간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이춘재 8차 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 징역을 살다 나온 윤씨가 청구한 재심이 개시되었다. 재심 재판부는 윤씨에게 사과하며 무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경찰, 검찰, 법원이 합세하여 힘없는 한 인생을 파멸시켰다.
재심으로 무죄선고만 하고 말 것이 아니다. 무고한 자를 사형시키고 징역 보내는데 관여한 판검사들, 고문한 수사관을 밝혀 단죄해야 한다. 과거의 잘잘못을 가려서 미래 세대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나라에 반역한 친일파 청산도 못했던 우리에게 이런 역량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관료들은 남이야 죽든 말든 시류에 따라 처신하며 영달을 누린다.
앞으로 법원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올바른 판결을 할 수 있을까? 시대가 바뀌면 유신시절의 판사들처럼, 다시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 재심 전문 변호사까지 있다는 것은 재판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해 준다. 지금 유죄가 선고된 사건도 훗날 재심에서 무죄가 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이제는 판·검사들의 권한행사에 국민들이 관여해야 한다. 검사가 기소를 하거나, 판사가 유ㆍ무죄를 결정할 때도 시민(배심원)의 의견이 구속력을 갖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법정을 비롯하여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불의가 넘치기 때문이다. 지난 촛불집회 때 군부는 계엄령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음습한 환경이 되면 독버섯이 솟아난다. 언제든지 지금의 평화는 한순간에 끝이 나고, 권위주의 정권으로 회귀될 수 있다. 그래서 4월 첫날,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하는 민주사회의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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