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이’라는 말이 있다. 맞다. 보통 ‘고무’라는 말과 함께 붙어서 나오는 그 이름. 요즘 같은 김장철에 여기저기서 한참 불리고 있을, ‘다라’라고도 불리는 그 이름. 내 인생 최초의 목욕탕이자 수영장이었을 그 이름. 이 다라이라는 말이 사람의 형상을 한 요정이라면 어떨까? 다라이가 정말 요정이라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의 모습이 아니라, 해리포터에 나오는 집요정 도비의 모습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도비처럼 혐오와 핍박의 대상일 가능성이 크다.
아닌 게 아니라, 요정 다라이는 벤또, 빵꾸, 공구리, 구루마와 같은 요정들과 함께 온갖 모욕을 받고 있다. 얼마 전 전북 지역 방언 조사 결과를 놓고 사달이 난 것이다. 전북 방언사전에 다라이, 벤또, 빵구, 공구리, 구루마 같은 말들이 실린 것을 두고, 한 도의원이 식민 잔재인 일본어가 전북 방언으로 ‘둔갑’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덧붙여 표준어까지 방언사전에 섞였다며 편찬의 부실을 주장했다. 전라북도 문화관광국장은 오류를 인정하면서 ‘개인적으로 수치스럽다’는 고백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많은 언론들은 이 기막힌 ‘부실 용역’에 대한 비난조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사전 회수와 소위 부적절한 말들의 삭제가 거론된다.
다라이와 그의 요정 친구들은 전북 방언일까 아닐까?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언어든 방언이든 그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상호소통 가능성이라는 기준을 두고 언어를 분류하면 손쉬울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경을 마주한 네덜란드어 화자와 독일어 화자는 서로 말이 통하고, 같은 중국어 화자라도 지방이 다르면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그러한 예다. 이처럼 어떤 말들을 ‘○○어’라고 규정짓는 것은 어렵다. 이런 이유로 사회언어학자들은 언어라는 말보다는 ‘코드’라는 말을 선호한다.
말에는 본래 국가도 없고 국경도 없다. 국경을 그어놓은들 말들은 수시로 국경을 넘는다. 한국이라는 국가 내부의 말들도 마찬가지다. 지역이나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변이들이 존재하며 이들 변이들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심지어 어떤 변이들은 수시로 끊임없이 이쪽과 저쪽 경계를 넘나든다. 말들은 결코 균질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어’라는 가공품의 ‘발명’은 이러한 차이를 일거에 제거해 버린다. 한국어라는 말 속에는 ‘언어 = 영토 = 국민’이라는 성스러운 삼위일체의 구도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이 구도를 통해 한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고 균질한 하나의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이 환상을 만들어 내는 장치는 다름 아닌 표준어 제정이다.
표준어 제정 과정에는 우생학과 위생학이 개입한다.(김하수, ‘진짜 한국어, 다시 보기’) 우생학적 처리 과정은 서울말을 우등한 것으로, 지역어를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 표준어에서 지역어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음은 위생학적 처리 과정. 이 처리 과정을 통해 토착어가 아닌 외래어들은 ‘오염된 말’이 된다. 순수한 언어란 있을 수 없지만 만들자면 쉽게 만들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어떤 것을 오염된 것으로 지목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순수한 것이 된다. 이런 가공 과정을 거쳐 한반도라는 명확한 영토와 경계를 가진 ‘한국어’가 발명된다. 이 한국어는 그냥 한국어가 아니다. 우생학과 위생학으로 담금질된 ‘우수하고’, ‘순수한’ 한국어이다. 그리고 이런 언어의 발명에는 사전 편찬이 동반된다.
우생학과 위생학에 의해 내쳐지기는 했지만 지역 방언과 외래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말들은 시장통에서, 친구들·가족들 사이에서 ‘힘 빼고’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일상어(vernacular)로 기능한다. 일상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소통’의 효율성이어서 소통만 잘 된다면 그 언어의 출신은 따지지 않는다. 일본이든 어디든 외국에서 왔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뒤섞였다고 흉보지도 않는다. 그저 잘 통하기만 하면 ‘장땡’이다.
우리들 머릿속 사전에는 두 종류의 요정들이 산다. 하나는 정장을 쫙 빼입고 거드름 피우며 있는 척하는 말의 요정들이다. 우리는 이 요정들을 회의석상이나 학교, 관공서에 갈 때 아니면 처음 보는 사돈과 상견례 하는 자리에 데리고 간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는 표준어들이 이런 요정이 된다. 까다롭고 껄끄러운 녀석들이지만 ‘고급진’ 곳에서는 이 녀석들과 함께해야 먹힌다.
다른 종류의 말의 요정들은 편한 ‘츄리닝’ 복장에 ‘쓰레빠’를 끌고 다니는 녀석들이다. 지역 방언이나 저잣거리의 말들이 이 친구들이다. 사실 이 요정들은 정장 입고 다니는 요정들의 위세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얘네들은 일상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튀어 나온다. 흥정을 할 때도, 동료와 시시덕거릴 때도, 왁자지껄한 동창회 모임에서도, 말 안 듣는 아이들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도 이 요정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요정들은 우리 일상의 삶에 착 붙어 있다.
다시 다라이와 그의 친구 요정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들은 전북 지역에 사는 화자들의 머릿속 사전에서 튀어나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차가 돌질을 가다 본게 차 바꾸에 빵꾸가 나 번짔어.’ ‘아이고 웬수 같은 비, 하눌이 빵꾸가 났는가 왜 이리 쏟아 붓는다냐.’(전라북도 방언사전에 나오는 예문이다. 생각해 보라. 빵꾸를 삭제하거나 ‘펑크’로 바꾸는 게 옳은 것인지.) 전북 지역 토착민들의 일상어를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언어학자들은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들을 전라북도 방언사전에 등재시켰다.
의원이 열 받은 이유는 우생학적·위생학적으로 당연히 처리되어야 할 ‘오염된 말’들이 전북 방언이라는 발명품 속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전북 지역에서 어떠한 말들이 사용되는지는 상관없다. 그 실상이 어떻든 이 발명품은 ‘고유하고 순수한 말들의 집합’으로 ‘상상’되어야 하는데 가만 보니 이물질이 들어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언어학자를 못난 말과 지저분한 말을 골라 처리하는 청소부라고 여긴다. 유능한 청소부인 줄 알고 언어학자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기대한 청소를 하지 않으니 화를 낼 수밖에. 그러나 이런 시각과는 무관하게도(또는 모순되게도) 언어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언어 현상을 기술하고 그 현상 속에 내재한 법칙을 찾아내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임무에 맞춰 전북 지역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말을 찾아내고 성실히 기록했을 뿐이다.
역사학자들은 자신이 발굴한 사료가 부끄러운 역사를 들춘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그 사료를 조작하거나 태워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실제로 사용된다고 밝혀낸 말들을 부끄러운 말이라며 사전에서 삭제하는 행위는 과연 정당한가?
고무다라이라는 말은 부끄러운 말도, 오염된 말도 아니다. 좀 못나고 세련되지 못했지만 고무다라이는 우리의 일상과 함께하는 말의 요정일 뿐이다. 우리의 진짜 삶 속에는 이런 요정들이 함께 한다. 그러니 부디 멀쩡한 방언사전, ‘빵꾸’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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