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청년에게 세계여행비 1,000만 원을 지원하자고 언급했다는 보도 이후, 도처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사실 이 지사의 해명과 해당 발언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상당히 과장된 비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이 글의 초점은 비판이 적절한가보다는 비판을 위해 동원된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에 있다.
사실 이 지사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인과 정책이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가깝게는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지원금과 손실보상 문제가 그랬고, 나아가 기본소득을 포함하여 복지정책과 관련한 많은 주장이 반대 측으로부터 비슷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과연 포퓰리즘이 무엇이기에 자꾸 소환되는가?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포퓰리즘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포퓰리즘은 기득권을 누리는 엘리트와 일반 대중 간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둘째로 포퓰리즘은 정치적 권위는 일반 대중의 의지로부터만 비롯되며, 이러한 의지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대의제를 비롯한 민주적 절차나 소수자 보호 장치 등은 무시될 수 있다고 본다. 동시에 포퓰리즘은 추상적인 구호를 제외하고는 정작 어떤 구체적인 정책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대중의 의지를 참칭하는 지도자에 의해 오남용될 소지가 크다. 미국의 트럼프가 현실에서 포퓰리즘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보여준 바 있다.
과연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많은 주장이 실제로 포퓰리즘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의 재정이 투입되어 일반 대중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정책이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었지만, 이러한 정책 중 어느 것도 대의제 민주주의의 틀을 벗어나서 추진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은 주로 해당 주장이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은 좋아하겠지만) 실상은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정치적 논쟁은 선호의 문제이며, 찬성과 반대가 갈릴 수 있어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는 어렵다. 따라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은 정치적 논쟁을 이어가기보다는 오히려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상대가 애초에 그릇된 주장이라는 생각을 깔고서는 생산적인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그릇된 주장에 현혹되어 지지를 보내는 일반 대중들의 판단 능력을 내려다보는 무의식적인 우월감 역시 지적해야 할 것이다.
비록 설익은 아이디어일지 몰라도 이재명 지사의 언급은 한국 사회의 학벌 구조 및 대학 진학자와 비진학자 간 차별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볼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기본소득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손실보상제는 공동체의 안전과 개인의 희생, 그리고 국가의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된다. 물론 각각의 사안에 대해 생각은 다를 수 있고, 서로 다른 생각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 다만 나와 다른 생각에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건강한 논쟁을 통한 정치적 합의의 가능성을 고사시킬 뿐이다. 올바른 비판은 과연 이러한 주장이 산발적인 문제 제기를 넘어선 콘텐츠와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는지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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