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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력주의가 공정할까

입력
2021.06.02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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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경쟁은 출발점이 같아야 성립?
재능도 노력도 불평등한 상황 외면한 채?
경쟁만 강조하는 능력주의는 차별 심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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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모든 이들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주어져 있음을 안다. 기회가 없었던 과거와 달리 사람들이 지위에 매어 있지도 않은데, 그런데도 자신은 낮은 지위라는 걸 생각하면 어떨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층민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근거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쓴 책 ‘능력주의의 등장’의 한 대목이다. 영은 2033년에 사는 역사가가 과거를 돌아보는 형식으로 이 책을 썼는데, 그의 예상보다 12년 앞서 우리 사회에서 같은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는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가 그 흐름의 주인공이다. 그는 공약으로 공천 자격시험 도입을 내놓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공정하게 경쟁해 통과해야 정치를 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저는 능력주의가 낫다고 본다”고 밝혔다. ‘능력주의’라는 단어를 만든 영은 이를 부정적으로 사용했지만, 이 후보는 공정의 잣대로 제시한다. 이 후보는 또 “젊은 세대는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이 되려 2, 3년간 공부하는데, 우리 당도 그에 준하는 노력을 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발 더 나아가 같은 논리로 소수자를 배려하는 각종 할당제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이 후보의 능력주의 공약은 20ㆍ30대의 뜨거운 지지 속에, 그를 일약 제1 야당의 유력 당대표 후보로 올려놓았다. 능력주의의 득세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젊은 세대의 실망이 가장 큰 원인이다. 현 정부가 지지층을 늘리기 위해 ‘약자 보호’를 위한 각종 특혜를 쏟아내며 공정한 경쟁 원칙을 훼손했고, 그 피해는 젊은 세대가 짊어지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집권 세력 일부는 그 그늘에서 특혜를 사유화하는 이중성마저 드러났다. 그래서 더 ‘경쟁 절차의 공정성’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90년대생이 쓴 90년대 세대 분석서 ‘K-를 생각한다’의 저자 임명묵은 “90년대생 사이에서 공정은 가치와 논리보다 느낌, 즉 ‘공정감’의 문제다”라고 진단한다. 어떤 세대보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면서도 이전 세대보다 가난해질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최초 세대가 느끼는 불안 때문에 공정감이 강해졌을 것이다.

모든 이가 공평하게 가진 노력만이 가장 공정한 평가 척도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시각에서 보면 여성, 장애인이란 이유로 ‘덜 노력해도’ 성취할 수 있는 ‘할당제’는 불공정하다.

절차가 공정할 경우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주요인은 재능과 노력이다. 그런데 노력도 재능만큼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학비를 벌기 위해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하는 학생과 쾌적한 환경에서 온종일 공부를 할 수 있는 학생의 노력이 어떻게 같은 출발점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나. 오래 앉아 있기조차 힘든 장애인은 어떤가. 똑같이 입사했지만 여성 임원 비율이 5%를 넘지 못하는 우리 기업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까.

스스로 노력해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 다수가 자신의 성공에는 주변과 사회의 도움 그리고 운이 크게 작용했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자신의 성취를 이웃과 사회에 되돌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반면 물려받은 부를 지키기 위해 투기, 탈세 등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을 강조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약자를 위한 할당제 폐지는 출발선이 공평하지 않은 경쟁의 현실을 외면하고 은폐한다. 게다가 한참 뒤에서 출발해 뒤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패자들이 ‘내가 재능도 노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부당한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능력주의야말로 젊은 세대가 원하는 공정을 가로막는 가장 위험한 장애물이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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