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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산재노동자 탓하는 나라

입력
2021.06.09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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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항 산재에서도 또 불거진 노동자 책임론?
?노동계 “안전조치 무지한 기업, 노동자 탓부터”?
?기업 인식 근본 변화 없이 산재 줄이기는 요원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3일 경기 평택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선호씨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을 위로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3일 경기 평택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선호씨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을 위로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벨트가 있는 기계 안쪽으로 고개를 넣고 점검하지 않아도 된다. 매뉴얼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2018년 12월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업체 노동자 김용균씨가 석탄운반 벨트를 점검하다 벨트와 롤러 사이에 끼여 숨지자 서부발전 관계자가 현장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사고에 앞서 서부발전이 이상이 발생한 설비 부위 사진을 ‘상세히’ 찍어 제출하도록 하청업체에 지시했다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맥락을 생략한 채 고인이 무리하게 작업해 사고를 당했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그의 태도는 2016년 5월 서울메트로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하청업체 노동자 김모군이 사망했을 때와 유사하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당시 “승강장 내 작업을 할 때는 역무실에 와서 작업내용을 보고해야 하는데 김씨는 역무실에 들어와 작업일지를 작성하지 않았다” “작업인원 2인 미만일 때는 작업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언론에 김군 탓을 했다. 하지만 그의 설명에는 서울메트로가 사고접수 시 1시간 내 출동해 작업을 완료하지 않으면 배상책임을 청구하겠다고 하청업체에 지시했던 사실은 쏙 빠져 있었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일단 노동자들의 부주의나 과실 탓을 하는 건 우리 기업들의 익숙한 ‘매뉴얼’이다. 지난 4월 평택항에서 300㎏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진 고(故) 이선호씨 유족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장례식장을 찾아온 회사 관계자는 “왜 아드님이 작업 중에 안전모를 쓰지 않았냐” “회사의 잘못도 있고 노동자의 잘못도 살펴야 한다”며 책임을 떠넘기려는 분위기를 느꼈다고 유족 측은 밝혔다. 안전모를 지급할 의무도, 안전모가 없으면 작업에 투입시키지 말아야 하는 건 회사의 의무다.

노동자에 대한 산재 책임전가가 단지 기업이 사고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라면 이해할 여지라도 있으련만 그렇지만도 않다. 10년 이상 산재 피해자를 지원해 온 한 노동계 관계자는 “회사들이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무엇을 했어야 하는지’에 대해 워낙 무지(無知)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어떤 안전조치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사고가 나면 ‘당사자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부터 따진다는 얘기다.

이선호씨 사고 뒤 고용노동부는 평택항에서 원청업체를 단 이틀간 점검했는데 법 위반 사항이 17건이나 나왔다. 대개 보호장비 미지급, 위험물질 경고표지 미부착, 감전위험 부위 방호망 미설치 같은 회사의 무지 탓을 하기도 민망한 상식적 안전조치도 외면한 사례였다. 이처럼 산재의 원인을 ‘근로자의 불안전한 행동’으로 바라보는 인식은 기업의 최고경영자부터 말단의 현장 관리자까지 뿌리 깊다. 지난 2월 국회 산재청문회에서 사망사고가 반복적으로 일어난 조선회사 대표가 “불안전한 상태와 작업자의 행동에 의해 (산재가) 많이 일어났다”고 한 건 그냥 나온 발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이라는 경제 규모에도 불구하고 산재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4위인 산재후진국이다. 법과 제도가 없는 건 아니다. 산재보험은 모든 사회보험 중 가장 빨리 도입(1964년)됐고, 산재 발생의 근인이 원ㆍ하청 위계구조에 있다는 점을 감안해 원청의 책임을 대폭 강화하도록 법까지 바꿨다(‘김용균법’). 그럼에도 산재 사망자는 늘어나거나 제자리걸음이다. 산재를 개인의 불운으로 취급하는 인식 때문이라는 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선호씨 사망(4월 22일) 이후 여당의 지도부가 평택항에서 최고위원회의를 하고 대통령이 조문을 했어도 그 이후 끼이고, 떨어지고, 깔려 사망한 노동자가 51명이나 된다. 사고가 나면 노동자 탓부터 하는 기업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우리는 추모가 일상인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이왕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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