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껏 스스로를 진보적인 교사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학창 시절에는 학생운동 언저리에 머물며 전교조 선생님들이 만든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를 보며 교사의 꿈을 꾸기도 했고, 교사가 되어서는 교육에 반하는 것들에 맞서며 나름 아이들과 동행하며 살아왔다. 이런 내가 요즘 보수적인 교사로 변해간다. 학교 측의 징계에 맞서 학생을 지키려고 하기보다 법령과 학칙을 위반한 학생을 징계하기 위한 사무를 묵묵히 수행한다. 교육공동체의 이상을 꿈꾸기보다 양육의 책임을 방기하며 학교의 안녕을 해치는 보호자와 언쟁하는 일이 늘어간다. 나는 왜 이렇게 보수적인 교사로 변해가는 걸까? 세월 따라 변해가는 내 탓이 가장 크겠지만 그 흔한 세상 탓이라도 해야 덜 억울할 것 같다.
며칠 전, 여당 대선주자 중에 한 사람이 기발한 공약 하나를 발표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밀집도가 높은 도심지에는 고층 건물을 지어 5층까지는 학교로 활용하고 6층부터는 주택으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주교복합건물’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기발한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 발표를 듣는 순간 전직 유명 정치인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의 남는 교실을 활용하여 초등 저학년 학생들을 오후까지 학교에 머물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학교의 현실은 법적 근거도 없이 시행된 방과후활동과 돌봄을 책임지느라 탈의실, 휴게실, 회의실 등도 변변하게 없고, 심지어 교실을 방과후교실과 돌봄교실로 겸용하고 있는데 학생 수가 줄었으니 교실이 남아돌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니 이제 이런 말에 놀라지도 않는다. 여야, 보수 진보를 떠나 정치인들이 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은 늘 이랬다. 주차장, 체육시설, 통행로, 공원 등으로 활용한다며 학교 시설의 개방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요구들은 관련 법령을 만들면서까지 이미 상당한 내용이 현실이 되고 있고, 학교에서 교육과정 운영과 학생 안전을 위해 개방을 불허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악성민원을 각오해야 한다. 학교는 공공재이니 주민편의를 위해서라면 누구나 학교를 이용해야 한다는 발상이 초래한 결과다.
학교를 이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은 늘 하면서도 교사의 자격은 또 아주 쉽게 안다. 교육의 질을 높이자면 정규 교원을 채용해야 하는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 입맛에 따라 사업을 만들어 각종 계약직 교원을 늘려왔다. 이 정책들의 시행 결과가 오늘날 학교비정규직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돌봄 갈등도 다 여기서 비롯됐다. 교육은 입시에만 관심이 있고, 순간적인 일자리 창출 효과를 위해서라면 아무나 교육을 해도 된다는 발상이 초래한 결과다.
헌법이 밝히고 있는 교육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자면, 학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 그 누구나는 최소한 학교를 교육기관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교육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그 아무나는 최대한 교육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내게 교육은 바꿀 건 바꾸고 지킬 건 지키는 것이다. 진보 보수로 나누던 교육의 시대는 끝났다. 3년간 써왔던 칼럼도 이 글로 끝났다. 부족함도 고마움도 알았고 학교의 속사정도 알렸다. 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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