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나이를 묻지 않는 게 예의인 사회에서 아시아인의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하는 백인들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나이 든다는 생각을 잘 안 하고 사는 편인데, 아직 젊다는 환상을 깨주는 것은 역시 틴에이저인 아이다. 특히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대화할 때마다 나도 구닥다리가 되어 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얼마 전 아침 식탁에서 아이가 친구에게서 문자가 오자 씩 웃더니 셀카를 찍는다. 왜 사진을 찍냐고 물으니 친구들이랑 문자 할 때 서로 사진을 찍어 보낸단다. 쿨한 아빠였다면 여기서 멈추고 화제를 바꾸거나 묵묵히 아침을 먹었을 텐데, 역시 쿨하지 못한 나는 왜 아침 식탁에서도 친구랑 문자를 주고받는지, 또 SNS에서 개인정보를 공유하는 게 왜 위험한지에 대해 설교를 늘어 놓았고, 결국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 이웃에 사는 아내 직장동료 가족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하는데, 자연스럽게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고 또 당연히 아이들 휴대전화 습관에 대한 불만과 걱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로 끊임없이 뭔가를 주고받는 아이들 이야기를 하다가 옛 시절 이야기가 나왔는데 (역시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 아내의 동료는 틴에이저 시절 장거리 전화비용을 아끼기 위해 해외에 살던 오빠와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멀리 있는 오빠를 생각하며 녹음기에 대고 가족과 자기 근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더 오래된 이야기지만, 독일에서 유학하신 외삼촌의 서간집(書簡集)에서 지인과 저녁 약속을 잡기 위해 교환한 엽서들을 본 기억이 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그 초대를 수락하고 중간에 지인이 출장을 가게 되어 약속을 변경하는 과정이 2주 넘게 교환한 여러 통의 엽서에 단정한 필체로 기록되어 있었다.
몇 해 전 연구년에 한 학기를 혼자 영국에서 지냈다. 매일 아내, 아이와 화상통화도 하고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혼자 와 있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화상통화로 달래지지 않는 그리운 마음도 있어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아이가 좋아할 만한 예쁜 엽서를 고르는 재미도 있고 해서 거의 매일 엽서를 쓰게 되었다. 그날 일상의 단면을 트위터 메시지보다 조금 더 길게 적어 보낸 간단한 엽서들이지만, 카페나 펍에 앉아 그 엽서를 쓰던 순간들은 아직도 행복한 기억으로 생생히 남아있다. 지금도 가끔 그 엽서들을 꺼내 보며 그 순간들을 즐겁게 회상한다. 그 시절 수도 없이 교환했을 문자는 이미 흔적도 없이 가상공간 어딘가로 사라졌고 그 많은 화상통화의 기억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네만은 인간의 행복에 현재 경험하는 행복감과 회상하며 기억하는 행복감이 둘 다 중요하다고 했다. 원할 때 언제든지 가족이나 친구와 화상통화를 하고 문자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 분명 현대 통신기술이 준 큰 선물이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적고 다시 며칠을 기다려 받아보는 손편지와 엽서 같은 오래된 기술은 두고두고 기억되는 깊은 행복감을 안겨준다. 어느 덧 한 해 동안 신세진 사람들을 생각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성탄과 송년 축하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좋지만, 몇 사람에게라도 고운 카드를 골라 못난 손글씨로 몇 자 적어 보낼 계획이다. 역시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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