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마스크를 쓰고 하는 대면수업에도 제법 익숙해져 큰 불편 없이 첫 강의를 했다. 하지만 가르친 지 15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강의계획서를 준비할 때 학생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학점을 줄 것인지 정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언뜻 생각하면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학생들이 수업에서 배운 것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시험과 과제물을 통해 측정하고, 그 점수를 합산해 A, AB 등으로 나누어 전산 시스템에 입력하면 된다. 지금까지 학점에 대해 항의하는 학생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매 학기 강의계획서를 준비할 때마다 이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학점이라는 게 학습 성과로 드러나는 능력과 노력을 잘 반영해야 할 텐데, 이를 정확하고 공정하게 측정하는 게 쉽지 않다. 주어진 시간에 똑같은 문제를 푸는 시험이 공정해 보이지만, 어떤 학생은 이런 시험에 심리적 부담감을 느껴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한다. 수업도 열심히 듣고 과제물도 잘 해내는 학생이 유독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시험 중심으로 학점을 내면 이런 학생에게는 불리하다.
그렇다고 시험을 없애고 수업 참여와 과제물로만 학점을 내면 꾸준히 노력하는 학생들은 대체로 좋은 학점을 받지만, 그중 특출나게 우수한 학생을 가려내는 것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어떤 학생은 수업을 빠지고 과제물을 안 내기도 하지만, 영리하고 이해력도 뛰어나 수업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 시험을 보면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 이런 학생은 시험에 높은 비중을 두면 유리한 반면 수업 참여와 정기적 과제물에 높은 가중치를 두면 불리하기 마련이다. 결국 어떤 도구로 성과를 측정하고 어떻게 가중치를 두느냐에 따라 어떤 학생에게는 유리하고 다른 학생에게는 불리해진다.
이렇게 낸 점수를 다시 학점으로 환산하는데, 연속적으로 분포된 점수를 A, B, C 등으로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93점을 받은 학생은 A가 되지만 92점을 받은 학생은 AB가 된다. 92점과 93점은 큰 차이가 아니고 실제 두 학생의 성과는 비슷하다. 그러나 이를 A와 AB로 입력해 놓으면 학점 산정의 복잡성과 애매함은 알파벳 문자의 날카로운 구분에 의해 가려지고 두 학생 간에 마치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문제는 별 것 아닌 차이도 이렇게 선명한 학점으로 표현하면 그에 따른 불평등한 분배가 쉽게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학과의 한 동료교수는 실험에서 참여자들에게 가상의 직원들의 성과 보고서를 읽고 1만 달러의 성과급을 나누어 주도록 했는데, 보고서와 함께 우수, 보통 등의 등급을 보여 주었을 때, 그리고 그 등급을 고과점수로 수치화해 보여 주었을 때, 참여자들이 성과급을 훨씬 더 불평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똑같은 성과의 차이도 등급화하고 그 등급을 점수화하면 사람들이 불평등한 분배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는 결론이다.
상대적으로 비슷한 배경을 가진 한 대학의 같은 전공 학생들이라는 동질적 집단을 대상으로, 목표가 비교적 뚜렷하게 설정되어 있는 수업에서 학습 성과에 따라 학점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능력주의를 부와 자원이 정의롭게 분배되는 원리로 적용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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