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1980년대 한국에는 금지곡, 금서 등 금단의 문화콘텐츠가 많았다.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영화 제목이기도 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도 한동안 금지곡이었다. 딱히 '불온'해 보이지 않는 노래나 책들을 왜 금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금지'라는 딱지가 붙으면 더 궁금해지고 뭔가 더 있어 보이는 게 사춘기 심리인지, 고등학교 시절 주말이면 친구들과 불법 복제음반을 찾아 청계천을 헤매곤 했다.
세계 모든 문화콘텐츠를 스마트폰에서 쉽게 즐길 수 있는 지금, 그것도 표현의 자유를 지상 최고의 선인 양 하는 나라에 살면서 이 묵은 기억을 새삼 꺼내는 것은, 최근 미국에서 특정 도서들이 학교와 도서관에서 금서로 지정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이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진행되고 있어서다. 어느 지역 학교 이사회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마우스'라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만화책을 욕설과 누드가 나온다는 이유로 금서 목록에 올렸고, 미시시피주 어느 도시 시장은 공공 도서관에서 성소수자를 다루는 모든 책을 없애지 않으면 예산을 끊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런 논쟁은 학교 교과과정 전반으로 확산되어, 보수적 백인 학부모와 정치인들은 학교 교육이 백인에 대한 증오를 키운다며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는 물론이고 인종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라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실제 테네시주에서 도입된 법안은 '인종과 성과 관련해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는' 내용을 공립학교 교과과정에서 일절 금지한다고 한다. 내가 일하는 대학에서도 최근 한 보수단체가 인종과 성 관련 강의를 하는 학과들의 모든 강의계획서를 공개하라는 정보공개 청구를 내서 나도 강의계획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있다. 학과 홈페이지에 이미 공개되어 있는 강의계획서를 굳이 정보공개 청구까지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역설적인 것은 특정 내용을 가르치지 말라거나 이런저런 책을 금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유명인사들의 인종주의적, 성차별주의적 발언이나 행동을 SNS에서 비판하는 '캔슬 컬처'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강력 반발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중성을 보면 미국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가 과연 누구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이상 자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자유는 사회적 관계와 규범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당연히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도 사회적 권력과 무관치 않다. 학교에서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를 배우는 '불편함'에서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금서목록을 만드는 보수적 백인사회가 유명인사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한 비판은 표현의 자유의 억압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에서, 미국사회 오래된 권력 지도의 긴 그림자가 보인다.
독재정권의 검열로 '정화'된 문화콘텐츠를 강요받고 자란 나에게 인지적 공감과 관용과 같은 시민적 덕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공의 일부는 나에게 복사본 김민기 테이프를 건네주고 나를 청계천 불법 복제음반의 세계로 안내해 준 친구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미국사회의 시대착오적 금서 논쟁을 보면서 아이에게 어떤 불온서적과 음악을 소개해 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들이 만들어 준 비속어가 난무하는 힙합으로 가득 찬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기우였음을 깨닫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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