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은 '면역'이라는 인체 반응의 기본작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이는 백신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특성이기도 하다. 백신을 작용하게 하는 건 항체라는 체내물질인데, 항체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특이성(specificity)이란 개념으로 설명된다. 특이성이란 하나의 항체는 하나의 항원(면역반응을 일으키는 병원성 물질)에 대해 반응한다는 것이다. 물론 무조건 일 대 일로만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연구결과를 통해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면역의 기본은 특이성에 입각한 항체 반응이다.
이렇게 개발된 백신의 과학적·의료적 역할은 당연히 병원체, 즉 감염병 대유행을 유발시키는 바로 그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직접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체내에 침입한 바이러스가 늘어나지 못하게 하고, 감염의 전파를 막는 것이 백신의 가장 기본적인 과학적 임무다.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항체를 만들어서 효과적으로 감염병을 방어하는 능력, 그리고 이 항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억력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능력이야말로 백신의 성공요건이다.
한편으로 백신에는 과학적 기능 외에 사회적 기능도 있다. 감염병 방역수단으로서 일종의 '보험' 같은 역할이라고 할까. 위기가 닥쳤을 때 보험에 들어 있으면 다소 안도가 되듯, 팬데믹 상황에서 백신의 효능이 좋다거나 접종률이 높다는 얘기를 접하면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위안을 받기도 하고, 그 사회 전체가 감염병에 대해 어느 정도 대응력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백신이 이런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려면, 즉 국민들을 안심시키려면 무엇보다 강력한 과학적 특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코로나19 백신의 경우, 최초 개발됐던 때에 비해 이미 변이가 많이 진행된 바이러스를 여전히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직도 과학적으로 우수한 효능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변이에 대해서도 위중증으로 발전하는 것은 막아줄 수 있다'는 건 백신이 갖고 있는 부수적 효능을, 백신의 사회적 기능에 맞춰 정책적으로 해석하는 정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백신개발의 속도를 높인다 해도 수많은 변이들을 따라가기란 힘들다. 그 때문에 기존의 백신이 무용지물이라거나 잘못된 방역정책이라 말할 수는 없다. 쓸 수 있는 백신이 이것밖에 없고, 위중증이라도 어느 정도 줄여 주는 만큼 현재의 백신은 가용한 의료수단 중에서 가장 유용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미 여러 번 크게 변이를 일으켜 멀리 달아나 버린 바이러스를 언제까지 효능이 불확실한 기존 백신만으로 대응해야 할까. 백신의 사회적 의미라면 모르겠지만 과학적 측면에서 보면 결코 정확한 대응책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변이를 따라갈 수 있도록 백신개발의 속도를 더욱 높이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팬데믹이 와도 이번처럼 한 가지 백신만 갖고 '그래도 위중증은 막을 수 있다'면서 급격히 증가하는 감염자 수를 허망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은 속도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엄청나게 신속해진 백신개발이지만, 감염 자체를 방어한다는 백신의 핵심적 특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보다도 빠른 개발능력을 꿈꿔 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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