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미국 정부가 우리 반도체 기업들에 선물한 대중국 수출통제 무기한 유예 연장조치 이후 우리 반도체 업계의 고민은 정부의 보조금 문제로 옮겨가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서 우리 정부도 미국이나 일본만큼 반도체 산업에 직접 보조금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러나 우리 상황과 미국, 일본, 유럽이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반도체 산업의 지원전략은 같을 수 없다. 산업구조나 교역구조를 무시하고 보조금 액수만으로 다른 국가들과 우리 정책을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반도체 생산역량이 부족한 미국, 일본, 유럽 등은 직접 보조금으로 어떻게든 반도체 생산역량을 확보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반도체 제조 분야를 선도하고 있는 우리는 보다 전략적이고 효율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우리와 비슷한 대만의 경우도 직접 보조금이 아닌 세제혜택과 행정지원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반도체 산업에 직접 보조금을 활용해야 한다면 현재 우리가 강점을 갖고 있는 분야보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장비나 소재 분야 지원을 통해 완결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안보 차원에서 최근 각국 정부의 반도체 분야 최대 고민은 오히려 최첨단 반도체가 아닌 레거시(legacy) 반도체 조달에 있다. 파운드리의 세계 최강자 삼성이나 대만의 TSMC가 수익률이 높은 첨단 반도체 양산 경쟁을 벌이며 그 비중을 늘리고 있는 반면, 중국 기업들은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포함한 주요국은 경제안보를 위해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레거시 반도체 분야에서 대중국 의존도가 올라갈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중국은 자국의 대표적인 파운드리 SMIC를 중심으로 글로벌 레거시 반도체 생산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전략에 나서고 있다. 어차피 미국의 강력한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 수출통제에 직면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이런 전략은 필연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중국은 매년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60%를 수입하는 거대한 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거대한 국내 시장을 활용한 규모의 경제로 승부하면 얼마든지 가격을 낮출 수 있고, 해외 기업들이 이 분야에서 생존하기 힘들도록 밀어낼 수 있다. 중국이 과거 자국의 철강산업 육성을 위해 취했던 전략을 통해 레거시 반도체 업계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셈법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챈 미국 정부는 미국 기업이 레거시 반도체를 어떻게 조달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2024년 1월부터 시작했다. 미 하원 중국특별위원회는 2023년 12월 보고서를 내고 미국이 레거시 반도체에 대한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첨단이 아닌 레거시 반도체까지 수출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약 미국이 행동에 나선다면, 과거 '슈퍼 301조'처럼 국가 안보를 사유로 중국산 레거시 반도체에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고율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최근 한미일 경제안보 협력에 관한 활발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필자는 레거시 반도체 생산과 조달도 3국의 실현가능한 유력한 협력 분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강점을 가진 분야에서는 더 빨리 달려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되 새롭게 열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보다 열린 시각의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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