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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복 있는 자들'

입력
2025.01.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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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당선자 길란(필명)

충분한 가난은 행운이 되기도 한다. 엄마는 말했다. 정말 다행이지 않니? 우리가 임대주택에 당첨될 정도로 가난해서.

우리가 당첨된 임대주택은 재개발 아파트단지 내에 있는 임대 아파트였다. 아현역 근처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신축 브랜드 아파트. 타인의 생활감이 남아있지 않은 곳에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벽지에 찢어진 부분도, 누런 때도 없었다. 문지방이 깨져 있지도 않았다. 이 집에는 다른 것들이 있었다. 대리석 무늬의 조리대 상판, 30분마다 공기를 순환시켜 주는 환기 시스템, 정해진 시간이면 자동으로 보일러가 켜졌다 꺼지는 난방 같은 것들. 현관에서 엘리베이터를 부를 수도 있었다. 아빠가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덕분이었다.

이 집에서 평생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에는 우리도 언젠가 부자가 되어 이런 집을 사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적금도 들고 학자금 대출도 갚았다. 4년 동안 1,500만 원을 모았다. 하지만 여전히 대출이 그보다 많았다. 아무리 일을 해도 잔고가 플러스가 되지 않았다. 이틀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작업을 하다 회사 수면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내가 평생 아등바등 일하며 돈을 모아봤자 영원히 이런 아파트를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돈을 모으는 것도 그만두었다. 모아둔 돈을 전부 학자금 대출과 전세 대출을 상환하는 것에 사용했다. 아파트를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아파트에 살기라도 해야 했다. 나는 임대주택에서 최대한 길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일반 임대주택은 거주기간이 최대 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주거급여 수급자가 되어 계층이동을 신청하면 20년 동안 임대주택에 살 수 있었다. 주거급여 수급자 자격을 잃지만 않는다면.

엄마는 작년에 이모 집으로 세대를 옮겼다. 나는 일 년 내내 중위소득의 43%인 97만 원을 넘지 않는 범위 내의 아르바이트만 했다. 모자라는 생활비는 엄마가 등하원 시터와 가사도우미 일을 해서 벌어오는 것으로 충당했다. 그렇게 주거급여 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주거급여 수급자가 되니 평생교육바우처도 지급되고 문화지원금이란 것도 나왔다. 그걸로 수영장에 등록해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거급여 수급자가 되니 오히려 이 전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나니. 엄마는 자주 중얼거렸다. 그 말이 맞았다. 어차피 부자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아주 가난한 쪽이 좋았다.



수영을 마치고 집에 오니 엄마가 언제나처럼 식탁에 앉아 성경을 필사하고 있었다. 베란다 너머로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다.

“이번에는 다 멀쩡한 거로만 왔어.”

엄마가 냉장고에서 복숭아를 꺼내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이걸 제값을 주고 먹어야 한다고.

살레마켓에서 할인하는 과일을 주문하면 세 번 중 한 번은 상한 과일이 왔다. 사진을 찍어 고객센터에 문의 글을 올리면 과일값을 환불해 줬다. 상한 것이 아주 일부분이어도 그랬다. 과일을 따로 회수해 가지도 않았다. 이걸 알게 된 후로 나와 엄마는 살레마켓에서만 과일을 시켰다. 쿠폰을 적용하면 마트보다 싸게 식자재를 살 수 있었다.

“됐어. 환불 너무 자주 하면 의심받을 수도 있어.”

내 말에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얘들도 우리가 환불할 거 알고 파는 거라니까? 이걸 지들이 버리려면 봉툿값이니 처리비니 오히려 돈 나가는데, 우리한테 떠넘기면 그냥 환불해 주기만 하면 되잖아.”

논리는 이상했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손해보는 짓을 하겠어? 아무것도 안 따지고 환불해 주는 것도 다 이득이 되니까 해주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엄마가 복숭아를 깎아 접시에 내왔다.

“올해 과일들은 비싸기만 하고 맛이 없어.”

“비가 많이 와서 그런가 봐.”

나는 복숭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확실히 비싼 것 치고는 맛이 덜했다.

“전염병에, 홍수에. 이게 다 종말의 징조야.”

엄마가 중얼거렸다.

“개구리가 왜 저렇게 시끄럽겠니? 세상이 끝나려고 그런 거라니까. 출애굽기에도 나와.”

엄마는 걸핏하면 종말이 올 거라고 말했다. 성경에 나와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엄마는 진통제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또 아파?”

얼마 전부터 생리를 할 때처럼 아랫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점점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생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의 생리 주기는 더 이상 규칙적이지 않았다. 몇 달을 안 하고 넘어가는 때도 있었다.

“병원에 가라니까.”

내 말에 엄마는 손을 저었다.

“짝수 연도라 돈 내야 하잖아.”

몇 번을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나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식탁 위에 놓인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뭐야?”

엄마는 내 이름으로 왔길래 뜯어보지 않았다고 답했다. 뜯어보니 서대문구청 복지과에서 온 우편이었다. 내가 부정수급으로 신고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류아 언니와 다른 중급반 회원들은 이미 발차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물속으로 들어갔다. 준비운동을 하지 못해 물이 살짝 차갑게 느껴졌다. 강사가 중급반 회원들을 불러 모았다.

“흔히들 평영을 개구리 수영이라고 알고 있죠. 개구리처럼 하는 발차기를 웨지킥이라고 해요. 초급 때는 개구리처럼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중급이니까 개구리 수영을 하면 안 돼요. 초급 때 윕킥으로 배우셨을 텐데 계속 웨지킥으로 발차기를 하는 분들이 계셔서요. 오늘은 발차기 교정을 할 거예요.”

강사는 윕킥의 시범을 보인 후 우리에게 킥판을 잡고 윕킥으로만 레인을 네 바퀴 돌고 오라고 시켰다. 나는 류아 언니 다음으로 출발했다. 익숙하지 않은 영법인 데다 킥판까지 잡고 있으니 속도도 느리고 평소보다 힘들었다.

“허벅지랑 무릎 벌리지 말아요. 발만 밖으로 벌려서 다리를 더블유 모양으로 만들었다가 발을 모으면서 물을 밀어내는 거예요.”

강사가 내 발을 붙잡고 움직였다. 강사의 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하체가 아래로 가라앉았고 몸은 앞이 아니라 위아래로만 움직였다. 뒷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다리를 개구리처럼 벌렸다. 그제야 몸이 물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공문에는 내가 동거인과 동거인의 소득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누가 신고한 걸까? 같은 임대 동 사람들일까? 임대주택 거주자의 부정수급이나 규칙 위반을 신고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같은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라고 들었다. 나와 엄마와 함께 사는 모습을 보고 같은 동의 누군가가 신고했을 수도 있다. 임대주택은 1인 1가구 거주가 원칙이니 말이다. 직계가족과의 동거는 예외적으로 허용되지만, 이를 아파트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가 등하원 시터로 일했던 집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작년 초에 일했던 집과는 끝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다 달라거나 목욕을 시켜달라는 요구를 하기에 시급을 올려달라고 했더니 엄마를 해고한 것이다. 그러고는 아파트의 다른 사람들한테 엄마가 아이들에게 정이 없다고 말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덕분에 엄마는 한동안 다른 등하원 시터 일을 구하지도 못했다.

“희재 님, 무릎을 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셔야 해요.”

강사가 말했다. 어느새 두 바퀴를 다 돌고 도착 지점에 돌아와 있었다. 강사는 풀부이를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네 바퀴 더 돌아보자고 했다. 풀부이를 끼니 발차기가 더 어려웠다. 앞으로 가기는커녕 뒤로 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수영을 하는 내내 나를 부정수급자로 신고한 게 누구인지 계속 생각했다. 짚이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모두 심증뿐이었다. 사실 신고자의 이름을 알아낼 방법이 없는지 인터넷에 검색도 했었다. 당연하게도 신고자의 이름은 알 수 없다고 한다. 공익 신고자 보호법이라는 게 있다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저주밖에는 없었다. 어떤 새끼인지는 모르지만 그 새끼도 좆되라지. 속도위반 하는 족족 다 걸리고 불법 주정차도 다 걸리라지. 그러는 사이 내 몸은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수영이 끝나고는 류아 언니와 함께 재개발 아파트단지 건너편의 빌라촌으로 향했다. 빌라촌의 식당들은 아파트 상가의 식당들보다 특별히 맛이 좋거나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저렴했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공동현관이 없는 빌라들을 여럿 지나쳤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 길에 노출되어 있는 집들. 그런 집들은 대부분이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랑 엄마도 저렇게 살았었다. 술에 취한 남자가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10분 남짓하게 걸었을 뿐인데 그새 땀이 흘러 온몸이 끈적끈적했다. 식당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쐬자 그제야 살 거 같았다. 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사 갈 집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예비 신랑 직장 때문에 강서구에 신혼집을 알아보고 있는데, 전세 사기가 터져서 걱정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언니도 그냥 가게 접고 임대주택 신청하라니까?”

언니의 앞에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언니 남자 친구 소득만 따지면 소득 기준 안 넘는다며. 카페로 버는 돈 한 달에 100만 원밖에 안 되는데 그냥 가게 접고 임대주택 들어가는 게 낫지.”

언니는 한숨을 쉬었다.

“남편이 버는 돈만 가지고는 생활비만 겨우 할 수 있어서. 100만 원이라도 더 벌어야 돈을 모으지.”

언니의 말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아직도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으면 집도 살 수 있고 부자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 서울 안의 아파트 매매가가 최소 5억부터 시작인데, 한 달에 100만 원씩 벌어서 언제 5억을 벌겠다는 건지.

곧 우리가 시킨 칼국수가 나왔다. 한동안 우리는 말 없이 칼국수를 먹었다.

“너는 거기 앞으로 20년 더 살 수 있다고 했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언니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0년 후에는 어떡하게? 모아둔 돈도 없을 텐데.”

“고령자 계층 전형이 있어서, 엄마가 그거로 임대주택 신청하고 내가 들어가서 살면 돼.”

내가 세운 계획은 이렇다. 앞으로 20년 동안 주거급여 수급자가 되어 지금 집에서 산다. 그때쯤이면 엄마의 나이가 65세를 훌쩍 넘기 때문에 고령자 계층으로 임대주택을 신청할 수 있다. 계약이 만료되기 몇 년 전부터 엄마 이름으로 임대주택을 신청하다가 당첨이 되면 그곳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거기서 엄마가 죽기 전까지 살다가, 엄마가 죽고 나면 내가 고령자 계층으로 임대주택을 신청한다. 중간에 비는 시간이 몇 년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정도면 완벽한 인생 계획이다. 가난하게 사는 걸로 평생 서울 안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난 평생 가난했는데.

“넌 진짜 대단하다.”

내 말에 언니가 말했다. 어딘가 비꼬는 듯한 말투였지만 굳이 문제 삼지는 않았다. 멍청한 건 내가 아니라 언니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잖아.”

식사를 마친 후 나와 류아 언니는 카운터로 향했다. 언니가 먼저 카드로 계산한 후 내가 현금을 냈다.

“현금영수증 안 해? 그럼 내 이름으로 할래.”

언니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번호판에 자기 번호를 눌렀다.

가게를 나올 때 언니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저런 가게들은 현금영수증 안 하면 탈세해.


행정복지센터에 찾아가 공문을 건내자 복지과 공무원이 이런 일이 드물지도 않다는 듯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제출해야 하는 소명자료 목록이 적혀있었다. 공무원은 엄마를 내가 사는 가구에 전입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심사를 다시 한 후 소득과 재산이 선정 기준을 넘지 않으면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고. 2024년의 주거급여 수급자 선정 기준은 중위소득의 48% 이하였다. 월 소득이 1인 가구는 106만 원, 2인 가구는 176만 원 이하여야 주거급여 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내 계산으로 나와 엄마의 한 달 소득은 200만 원 정도였다. 절망에 빠진 채로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성경을 필사하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외쳤다.

“나 알았어!”

“뭐를?”

“우리가 신고당한 이유!”

엄마가 주방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엔 이번 달 치의 나라미 10kg 한 포대와 살레마켓 박스가 있었다.

“이런 걸 문 앞에 두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신고하지! 나라에서 쌀 받아먹는 거 보면 수급자인데 살레마켓같은 걸 시켜 먹으니까 가짜로 가난한 척하는 줄 알 거 아니야.”

아차 싶었다. 그래, 여긴 보육원 아이들이 오리털 패딩 입는다고 민원 넣는 씹새끼들의 나라였지. 가난한 놈들이 잘 먹고 잘 살면 죄가 되는.

“진짜 너무한다. 우리가 뭔 명품을 들고 다니거나 외제 차를 끌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엄마가 열을 내며 말했다. 나는 오히려 나의 치밀하지 못함을 반성했다. 내가 또 한국을 얕봤구나. 하지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소명해서 다시 심사한 후에 자격 유지될 수도 있대.”

나는 엄마에게 공무원에게 들은 내용을 설명하며 살레마켓 박스에서 물건을 꺼냈다. 마늘쫑, 장조림, 맛김치 아래 복숭아가 있었다. 복숭아는 과하게 익어있을 뿐 상한 곳은 없었다. 엄마는 내 손에서 복숭아를 낚아채더니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우리 마지막으로 환불한 게 2주 전이었지?”

그리고 엄마는 엄지손가락으로 복숭아를 눌렀다. 복숭아의 연한 살이 뭉그러지고 갈색 멍이 들었다.

“여길 나가느니 죽고 말지.”

엄마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엄마는 배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관리사무소에서 안내 말씀드립니다. 8월 2일 오전 10시부터 8월 4일 오후 5시까지 그린힐 아현의 위탁 관리 업체 변경에 대한 투표를 진행하고 있으니 입주민들은 모두 투표를 해주기 바랍니다. 투표는 인아파트 어플로 가능하며, 어플로 투표가 불가능하신 입주민께서는 관리사무소에 오셔서 투표를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러운 안내방송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임대주택 거주자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어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안내방송은 한 번 더 반복되었다. 우리와 관련 없는 소리가 30초나 지속됐다. 그동안 엄마는 계속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공격을 피하는 짐승처럼.

“병원 가.”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해지기 전에 가야 돈도 덜 들어.”

한참 뒤에야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저거 환불해 달라고 해.”

어리둥절해하며 엄마가 가리킨 곳을 보니 복숭아가 있었다. 엄마가 멍을 만들어 놓은 복숭아.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식탁에 앉아 다시 성경을 옮겨쓰기 시작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에 엄마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 주거급여 수급 자격을 잃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창밖에서 개구리가 울었다. 시끄러워. 창을 닫고 싶었다. 방문도. 하지만 이 더위에 창도 방문도 닫을 수는 없었다.


더위와 습기를 피해 시청 쪽에 있는 류아 언니의 카페에 왔다. 장마가 한창이라 카페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 비를 뚫고 카페에 오는 사람은 현대판 노예들의 음료인 카페인에 중독된 사람이 아니면 집에서 에어컨과 제습기를 틀 여력이 없는 사람뿐일 테니까. 물론 나는 둘 모두에 해당했다. 덥지도 습하지도 않은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니 역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그냥 거기 전세 계약했어.”

언니가 말했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강서구에 집을 구한 모양이었다.

“등기 확인했을 때는 깨끗했는데, 문제없겠지? 내 전 재산이란 말이야.”

문제없을 거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그거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언니는 집주인이 주택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고, 이 집을 오래 가지고 있었고, 이 전에 살던 사람들도 다 멀쩡하게 나갔다는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돈 많아서 내 집 있으면 이딴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나도 건물주 돼서 월세나 받아먹으면서 살고 싶다. 코인이라도 대박 났으면.”

언니의 말에 그냥 맞장구치며 웃고만 있었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언니는 돌연 말을 멈췄다. 그리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 사람 또 왔네.”

언니를 따라 창밖을 보니 장대비 속에서 노숙인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왜? 내가 물었다.

“며칠 전부터 오는 사람인데, 자꾸 우리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잖아.”

노숙인이 카페 앞까지 왔다. 멀리 있을 때는 알아보지 못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여성이었다. 노숙인은 카페 옆으로 사라졌다. 건물 현관으로 들어간 듯했다.

“화장실에 도어락이라도 걸자고 해야지, 안 되겠어.”

언니가 중얼거렸다. 나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비가 너무 많이 오잖아. 저 사람에게도 화장실은 필요하잖아. 특히나 여자인데. 하지만 언니의 다음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노숙자들 이해가 안 돼. 사지 멀쩡한 사람이 왜 일을 안 해? 그 사람들 때문에 세금만 낭비되잖아. 정말 쓰여야 하는 데에는 안 쓰이고.”

언니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기라도 하듯 내 눈을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정말 운이 좋았던 사람이구나. 언니의 가족들도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구나. 일을 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었구나.

아빠는 새벽부터 가게에 나가 재료 손질을 하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문을 닫았다. 영업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게를 열었다. 박스를 옮기다 디스크가 파열됐을 때에도 그랬다. 그게 손님과의 약속이라 믿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남긴 게 하나도 없었다. 그건 그냥 운이 없어서였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운이 좋았던 거라는 걸 모른다. 어떻게 그렇게 순진하고 무지할 수 있을까? 나는 언니에게 묻고 싶었다. 언니는 노숙자가 일 안 하고 화장실 쓰는 건 싫으면서 건물주가 일 안 하고 돈 버는 건 괜찮아? 하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집에 오니 엄마가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엄마의 난소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그래도 빨리 발견해서 수술비가 얼마 안 하는 거래. 큰 수술도 아니고. 정말 다행이지. 주님이 은혜를 주시는 거라니까.”

엄마가 덤덤하게 말했다. 요즘 엄마는 은혜라는 단어를 종말이라는 단어만큼 자주 사용했다. 날이 맑으니 은혜라고 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에는 비가 오지 않는 걸 보니 종말이 올 거라고 하는 식이었다. 그 두 가지가 엄마한테는 큰 차이가 없는 듯했다.

병원에서 말해준 예상 수술비는 150만 원이었다. 통장에는 80만 원밖에 없었다. 1년 동안 주거급여 수급자로 살면서 모을 수 있었던 돈의 한계였다. 70만 원이 더 필요했다.


수영 강사는 더 이상 윕킥을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계속 웨지킥으로만 수영하니 그냥 포기한 듯싶었다. 류아 언니는 그새 윕킥에 적응했는지 이 전에 웨지킥을 할 때보다 빠르게 평영을 했다. 강사가 평영으로 세 바퀴를 돌고 오라고 했다. 나와 류아 언니는 줄의 뒤쪽에 서있었다.

“할 말 있다는 게 뭔데?”

언니가 말했다.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이런 상황에서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요즘 언니는 나와 함께 점심을 먹지 않았다. 따로 만나자고 해도 계속 바쁘다며 회피할 뿐이었다. 말을 하려면 지금밖에 없었다.

“혹시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앞 사람들이 차례로 출발했다. 아직 언니와 내 차례까지는 네 명이 남아있었다.

“돈은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언니는 딱히 놀라지도 않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할 줄 알았다는 듯이.

“엄마가 수술해야 할 거 같아서. 보험금 나오면 바로 갚을게”

류아 언니는 대답 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엄마의 어디가 아픈 것인지, 무슨 수술을 하는 것인지도 묻지 않았다. 줄이 점점 줄어들었다. 곧 류아 언니 차례였다.

“지금 여기서 할만한 얘기는 아닌 거 같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리고 류아 언니가 출발했다. 나는 류아 언니의 뒤를 따랐다. 언니는 점점 빨라졌고 나는 점점 느려졌다. 류아 언니는 그새 레인의 끝에 도착해 턴을 했다. 나는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언니를 따라갔다. 내가 턴을 하고 다시 출발 지점으로 향했을 때 언니는 이미 레인의 중간을 지나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웨지킥이 윕킥보다 비효율적이라는 게 틀린 걸 거야.

물속에서 멀어져가는 류아 언니를 보며 생각했다.

개구리는 웨지킥으로도 잘만 수영하잖아.

나는 더 빠르고 강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개구리처럼. 순간 종아리가 뒤틀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언니!”

간신히 류아 언니를 불렀지만 언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언니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의 고통 때문에 팔도 엉망으로 휘둘러졌다. 발을 바닥에 대고 일어설 수도 없었다. 몸이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코와 목으로 물이 사정없이 들이쳤다.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붙잡아 준 덕분에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먹은 물을 뱉어냈다. 코가 맵고 귀가 먹먹했다. 종아리는 여전히 아팠다. 강사가 와서는 쥐가 난 거 같으니 물속에 들어오지 말고 근육을 풀어주라고 말했다. 물 밖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있으니 류아 언니가 찾아왔다.

“그러니까 윕킥으로 하라고 했잖아. 웨지킥은 안 좋다고.”

류아 언니가 나를 안타깝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던 언니는 수영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말을 걸 틈도 없었다.


교회 사람들에게서도 돈을 빌릴 수 없었다. 엄마가 교회를 그렇게나 다녔는데도. 헌금을 적게 해서인지, 기부를 안 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람들 경조사 때마다 돈을 넉넉히 보내지 못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 선풍기를 틀고 있었지만 냉기 하나 없는 바람만 방 안을 맴돌았다. 작은방의 창문을 열고 베란다의 창도 열었다.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오늘 최고 기온이 40도래. 날씨가 미쳤지. 닭이 다 폐사했다고 계란 한 판이 만 원이 넘는다니까. 정말 세상이 망하려는지.”

매미 울음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 사이로 엄마의 말이 들려왔다. 개구리는 오늘따라 유독 시끄러웠다.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보험금 많이 나온다니까 얼마나 다행이니? 교회 사람들 말이 수술비보다 보험금이 훨씬 많다더라. 오죽하면 착한 암이라고까지 한대. 정말 잘 된 거 아니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거야.”

수술비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지만 나도 엄마도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방법은 어떻게든 찾을 수 있었다. 정 안되면 대출을 받을 수도 있고. 요즘엔 소액 대출도 있고 리볼빙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저놈의 개구리는 왜 저렇게 시끄러운 거야?”

나는 소리쳤다. 대체 이 아파트단지 어디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오는 거냐고. 그 말에 엄마가 모르냐면서 말했다.

“애들이 저기다가 올챙이 버리고 있잖아.”

“집 들어오는데 애들이 연못에 뭘 버리고 있더라고. 쓰레기 버리는 건가 싶어서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올챙이랑 개구리 버리고 있다고 하는 거야. 학교 숙제로 기른 건데 이제 숙제 끝나서 버려야 한다나.”

“그걸 그냥 뒀어?”

“나도 뭐라고 했지. 그걸 그렇게 막 버리면 되냐, 허락은 받은 거냐, 여기 개구리를 버리면 이 앞에 사는 사람들이 시끄럽지 않겠냐 하면서. 근데 애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니? 지네 아빠가 운영위원회인데 여기다 버려도 된다고 했단다. 그리고 112동에 사는 사람들은 진짜 우리 아파트 주민도 아니라면서요, 이러는 거 있지? 참나.”

어쩐지 문방구 앞에 개구리알 판다고 붙어있더라. 엄마가 중얼거렸다.

112동에 사는 사람들.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어지러웠다. 옆에서 엄마가 뭔가를 얘기했지만 더 이상 엄마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너무 더워서인지 너무 시끄러워서인지.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그대로 집을 나왔다. 1층으로 내려오니 개구리 소리가 더 심했다. 관리사무소는 연못 건너편 109동 1층에 있었다. 휘청거리며 관리사무소 안에 들어갔다.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직원들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기요, 저 연못에 개구리가 너무 시끄러워요.”

나는 창 너머의 연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직원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왔다.

“몇 동 몇 호 입주민이세요?”

순간 112동이라 대답할 뻔했지만 다행히 대답하지 않았다. 112동에 사는 사람들.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개구리가 너무 시끄럽다니까요. 너무 시끄러워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내 말에 짐을 챙기고 있던 다른 직원들도 하나둘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소리가 안 들리냐고 하려던 찰나, 나는 이곳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들이 저기다가 개구리를 버리고 있대요. 아파트 애들이요. 그거라도 좀 막아주면 안 돼요?”

직원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생태연못이라서요. 개구리 때문에 민원이 들어온 적도 없었고요. 따로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직원의 말투는 지극히 정중했다. 온몸의 열이 식기 시작했다.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에 몸서리가 쳐졌다. 굳게 닫힌 창문에는 결로가 맺혀 바깥이 희뿌옇게 보였다. 직원 중 한 명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따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직원이 물었다.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을 열라고, 창문을 열고 저 소리를 들으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관리사무소 밖으로 나왔다. 숨 막히는 더위가 얼굴을 덮쳐왔다. 개구리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주머니에서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새로 온 알람은 두 개였다. 하나는 류아 언니에게서, 다른 하나는 서대문구 복지과에서 온 것이었다.

언니의 문자는 돈을 빌려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는 이참에 제대로 살라는 말이 덧붙여 있었다. 편법만 쓰지 말고 정당하게 돈을 벌라고.

서대문구 복지과에서 온 문자는 내가 주거급여 소득 심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비닐봉지를 들고 집을 나왔다. 아파트단지의 집들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순찰을 돌고 있는 중인지 경비 초소도 비어 있었다. 가로등 덕분에 어둡지는 않았다. 나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연못 앞에는 과연 생태연못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공간이라고, 팻말에는 쓰여있었다.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 행복은 침대에 누웠을 때 주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옆집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창밖에 정원이 있는 것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개를 산책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한여름에 창문을 닫아놓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시끄러운 개구리들의 비명 따위는 듣지 않는 것이다.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사철나무를 넘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멈췄다. 물비린내가 났다. 개구리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물 속으로 숨어버린 것인지. 연못 안이 보이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수면 위로 가로등의 불빛이 부서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일단 첫 번째. 이 집에서 나가 다시 코딱지만 한 원룸에 들어간다. 그리고 직장을 구해 뼈 빠지게 일하며 돈을 번다. 버는 돈은 최소한만 남기고 모두 저축한다. 과일도 안 먹고 수영도 안 하면서. 그렇게 십 년을 모으면 1억이 모인다. 거기에 전세 대출을 받아 전셋집을 구한다. 그거로 끝이냐고? 당연히 아니다.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이자도 내야 하니까. 여전히 복숭아도 먹을 수 없고 수영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몇십 년 동안 대출금을 갚고 이자를 내며 산다. 대출금을 다 갚으면? 다시 대출받아야 한다. 이번에는 집을 사기 위해. 그 정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지어진 지 십 년은 된 아파트들뿐이겠지만, 그래도 드디어 내 집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것이 있다. 은행 대출. 집을 산 후에도 계속 대출을 갚고 이자를 내야 한다. 수영은 할 수 있고 과일도 먹을 수는 있겠지만, 이미 나이는 50이다. 평생 대출을 갚고 이자를 내다 정년퇴직을 할 때쯤에야 대출을 모두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 나한테 남은 건 일하느라 다 갈려 나간 너덜너덜한 몸뚱이랑 재개발만 기다리는 낡은 아파트 하나뿐. 그러니 어쩌겠는가. 나의 하나 남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값이 떨어지는 모든 정책에 반대하고, 아파트값을 올려준다는 정당에 투표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시끄러운 소리는 모두 듣지 않고. 두 번째는 이렇다. 일을 줄여서 소득을 줄인다. 그리고 다시 주거급여 수급자 신청을 한다. 1년만 주거급여 없이 생활하면 된다. 그러면 앞으로 20년 동안 이 집에 공짜로 살 수 있다. 수영도 하고 과일도 먹고, 일도 덜 하면서. 계산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안다면 후자가 더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렇다. 분명 그런데,

“나쁜 년.”

나는 연못에 발을 담그며 중얼거렸다. 나를 신고한 것도 그년일 거라고.

“망해버려라. 확 전세 사기나 당해버려라. 가진 돈 다 잃어버려라.”

발로 연못을 마구 짓밟았다. 개구리 몇 마리가 연못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물 밖으로 튀어나오는 개구리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개구리는 잽싸게 내 발을 피했다. 다리가 흙탕물에 뒤덮였다. 분을 이기지 못해 몇 번 더 발길질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연못 속에서 헛발질만 하다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었다. 모두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들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거지새끼는 서울에서 꺼지라는 듯이. 나는 서울이 고향인데도.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랐는데도.

“나쁜 년들. 씨발새끼들.”

나는 온몸이 더러워진 채 서 있었다. 내가 깨끗하지 못한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아? 집을 갖는 게 이렇게까지 힘든 게. 사람이 이렇게 더러워져야만 한다는 게.

“내가 도망칠 줄 알고?”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밝고 깨끗한 아파트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든 들러붙을 거야. 더럽고 치졸하고 비굴하게 버텨줄게. 너희들이 끔찍하게 보기 싫어하는 오물이 되고 소음이 되어줄게.

나는 비닐봉지를 뜯었다. 뜯어진 봉지에서 개구리알이 쏟아져나왔다. 백여 개의 개구리알이. 이 알에서 부화한 올챙이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간절히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길란(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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