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당선자 박형준
등장인물
제자 내상을 입은 환자.
협제 정파무림의 정신적 지주.
낭인 하반신 장애인.
무대
무대에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 치(약 2센티미터) 높이의 턱을 넘어야 한다.
무대에 조명이 들어온다.
좌측에서 협제와 제자 등장한다.
제자 갑자기 쓰러져 발작을 일으킨다.
협제: 증세가 도지는구나. 잠시 기다려라.
협제 제자를 앉히고, 그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아 가부좌를 튼다.
등에 양 손바닥을 대고 내공을 전이하자, 제자의 발작이 서서히 진정된다.
협제: 좀 나아졌느냐?
제자: 송구합니다 사부님. 늘 저 때문에.
협제: 그런 말 마라. 널 제자로 거둔 건 나다. 자식과도 같은 제자를 구원하는 건 스승 된 자의 당연한 도리이니라.
제자: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부님.
협제: 할 말이 있다면 숨김없이 털어놓거라.
제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
협제: 지친다니. 무엇이 말이냐?
제자: 제 병은 도대체 언제쯤 완쾌될 수 있는 걸까요?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사부님이 절 살려주시지만 바로 그 사실이 이 제자를 견딜 수 없이 괴롭게 만듭니다. 사부님의 내력을 좀먹고 있는 죄책감은 감히 형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허나 사부님의 내력을 갉아먹지 않으면 저 자신. 나무둥치의 벌레처럼 꿈틀거리다 비참한 죽음에 이르고 말겠지요. 사부님. 저는 나을 수 있을까요? 아니 호전이라도 될 수 있는 걸까요?
협제: 그 해답이 바로 이 다리 건너편에 있다.
제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협제: 어렸을 적 널 현명신장(玄冥神掌)의 한기(寒氣)에서 구해내지 못한 것은 내 평생의 후회다. 혈맥에 들어찬 음독으로 인해 그동안 많이 고달팠지? 기뻐해라. 너의 아픔은 이제 곧 씻은 듯이 사라지게 될 거란다.
제자: 어찌 그럴 수 있단 거죠?
협제: 놀라지 말거라. 저 다리 건너편에 있는 마을에 의선(醫仙)께서 와 계신다는구나.
제자: 그게 정말입니까!
협제: 만 가지 병을 다스리는 천하제일의 의원. 죽은 자에게조차 다시 숨결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의선 말이다. 그분께 너를 보일 작정이다.
제자: 믿기지가 않습니다. 평생 육체와 마음의 결함을 앓아온 제가 드디어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니요. 그런데 사부님. 은거기인이라 알려진 의선을 어떻게 찾아내신 겁니까? 듣기로 그분께선 두문불출하여 강호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신다 하던데요.
협제: 실은 얼마 전 무림맹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제자: 무림맹이요?
협제: 의선의 거취를 알려주는 대신 조건을 하나 내걸더구나. 나보고 무림맹주의 자리에 취임해달라 하였다.
제자: 무림맹주! …사부님. 그래서 수락하신 겁니까? 설마 저 때문에?
협제: 그래.
제자: 싫습니다. 어느 집단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독보강호하는 것. 자유롭게 산천을 누비며 협행하는 것이 사부님의 원(願)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접니다. 사부님의 내공을 축내는 것만으로 이미 사무치게 괴롭거늘. 불초제자에게 어찌 또 다른 대죄를 짊어지우려 하십니까?
협제: 부인하지 않으마. 내가 맹주석에 앉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분명 네가 있다. 하지만 내가 맹의 제안을 수락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느니라.
제자: 그 이유란 무엇입니까?
협제: 마교(魔敎)와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머지않은 앞날에.
제자: 오늘 저를 여러 번 놀라게 만드시는군요.
협제: 불의와 배덕을 주된 교리로 삼는 정파무림의 대척점. 마교의 세력은 근래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대해지는 중이다. 그에 비해 우리 정파에는 이렇다할 구심점이 없는 상황이야. 개인의 무위는 높되 서로 응집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지.
제자: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무림맹은 사부님께서 정파의 중심을 잡아주시길 바라는 것이로군요.
협제: 그뿐만이 아니다. 네가 의선에게 치료를 받는 동안. 이 스승은 황궁에 다녀올 요량이니라.
제자: 황궁이라니요?
협제: 마교를 섬멸하기 위해서는 우리 정파무림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전세의 균형을 깨뜨리기 위해선 황군의 협력을 얻어야 한다.
제자: 허나 황실과 무림맹은 상호불간섭의 관계이지 않습니까. 삼척동자도 아는 이 사실을 사부님께서 뒤집겠단 말씀이신지요?
협제: 무인들이 나를 맹주로 추대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니라. 강호에 자자한 이 나의 명성이라면 황상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으리라 판단했겠지.
제자: 과연. 일리가 있습니다.
협제: 제자야.
제자: 예. 사부님.
협제: 독보강호와 자유.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게 이 세상에 있다. 그게 무엇인지 네가 말해보겠느냐?
제자: 의협을 행하는 일. 어둠을 밝혀 천하에 광명을 가져오는 일.
협제: 이 스승은 재주가 모자라 지금껏 티끌만한 정의를 세울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 과정에서 협제(俠帝)라는 과분한 별호를 얻었지.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구나. 강호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으니 작은 협행만으론 천하의 어둠을 완전히 밝힐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무림맹주가 되겠다. 분열된 정파를 통합해 거대한 정의를 사해(四海)에 우뚝 세우며. 그로써 세상에 드리운 마의 그림자를 물리치려 한다. 그게 내가 맹의 요청을 수락한 이유니라.
제자: 그런 이유라면 마다할 수 없겠군요. 기꺼이 의선을 만나 뵙겠습니다. 하루 빨리 치료를 받아 사부님의 대업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협제: 음독이 치료되는 것은 물론이고. 잘하면 무공 또한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얼마나 잘된 일이냐? 네가 나와 함께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구나.
제자: 예. 사부님. 저 또한 늘 그 장면을 꿈꿔왔습니다.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거친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위력적인 검무를 펼치는 제 자신의 모습을.
이때 무대 오른쪽에서 낭인 등장한다.
휠체어를 탄 낭인에게 반 치에 불과한 턱은 태산처럼 높고 가파르다.
그는 안간힘을 써가며 간신히 다리에 오른다.
협제: 자. 어서 이 다리를 건너자. 우리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실 분이 저 너머에 계시잖느냐.
제자: 예. 사부님.
협제와 제자 다리 위에 오른다.
두 사람 낭인을 발견한다.
낭인이 이끄는 휠체어는 매우 느린 속도로 전진한다.
제자는 잠자코 기다리지만 협제는 마뜩잖은 기색이다.
협제: 크흠!
제자: 서, 선생. 어서 건너십시오!
낭인: 예예. 송구합니다. 나으리. 서두르겠습니다.
협제: 좁은 다리에서 이렇게 시간을 끌면 어쩌잔 말인가? 사지가 멀쩡치 못하면 가만히 집에나 있을 것을.
낭인: 소생의 불찰입니다. 용서하십시오.
낭인 휠체어를 전진시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를 가로막는 장벽은 높기만 하다.
제자 보다못해 낭인에게 다가간다.
제자: 도와드리겠습니다.
낭인: 아이고, 괜찮습니다.
제자: 아닙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낭인: 공자님, 정말 괜찮습니다. 소생 금방 지나가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제자 낭인을 말없이 바라본다.
제자: 선생, 주제 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낭인: 귀하신 분께서 소생한테 무슨 가르침을 주시렵니까?
제자: 다리 건너편에 의선께서 와 계신다 합니다. 선생께선 혹 들어보셨을는지요.
낭인: 의선이요?
협제: 어허. 제자야, 말을 삼가거라.
제자: 사부님. 어찌 저 혼자만 이 귀한 인연을 누리겠습니까. (낭인에게) 만병을 치료하는 천하제일의 의원이라는군요. 저는 지금 그분을 뵈러 가는 길입니다. 속병을 앓고 있거든요. 괜찮으시면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선생의 다리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낭인: 내 다리를요? 이십 년 전에 부러져 장작처럼 굳어버린 이 다리를?
제자: 주검에도 숨결을 불어넣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하물며 산 자의 다리 정도야 쉽게 고치지 않겠습니까.
협제: 이놈. 그만!
낭인: 고친다고? 하하하. 하하. 아닙니다. 공자님. 그 의선이라는 자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제자: 어째서요?
협제: 음?
낭인: 의선은 뒈졌소. 방금 그의 목을 베고 오는 길이오.
정적.
제자: (사색이 되어)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협제: (손을 검자루에 가져다댄다) 갑자기 튀어나와선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정체를 밝혀라.
낭인: (협제에게) 외람되오나. 나으리께서는 무림지사에 관여하고 계시지요?
협제: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라. 네놈은 누구냐.
낭인: 협제라 불리시고요.
제자: 의선이… 죽었어?
협제: 날 아느냐?
낭인: 죽은 의선이 일러주더이다. 협제가 그의 제자를 데리고 다리를 건너올 예정이라고.
협제: 그 말을 듣고도 그를 베었단 말인가? 이 내가 당도할 걸 알면서도?
낭인: 안 될 이유라도?
협제: 이놈!
협제 검을 뽑고는 낭인을 향해 돌격한다.
낭인 무릎 위의 지팡이를 휘둘러 협제의 검을 받아친다.
낭인 다리의 오른쪽 끝으로 밀려나고 협제 다리의 왼쪽 끝으로 튕겨 나간다.
무공의 충돌에 휘말린 제자 다리의 한 가운데 쓰러져 비틀거린다.
협제: 지팡이에 실린 내공은 마교의 것이 분명하군. 무공의 경지를 보아하니 네놈. 교주의 호법장로(護法長老) 정도는 되는 모양이로구나.
낭인: 이곳에서 협제를 만나다니 천운이 이것인가 싶소. 하늘이 날 돕는 건가?
협제: 헛소리 마라. 취임 전에 마교의 고수 하나를 처치할 수 있으니 정파무림의 홍복이로다!
낭인: 취임이라. 설마하니 무림맹주의 지위에라도 오르시나 보오?
제자: 그럼 난?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협제: 얘야. 정신 차려라! 사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제자: 치료할 수 없어.
협제: 이놈. 걸리적거리니 어서 뒤로 물러서래도!
낭인: 귀하의 제자요? 한심한지고. 그 협제 밑에서 배웠다는 놈이 이리 나약하다니.
제자: 다시 웅크리고 살아야 돼. 겨우 빛을 보았는데. 희망을 찾았는데. 난. 난 이젠 꿈틀거리기 싫단 말야….
협제: 얘야!
제자: 으윽.
제자 발작을 일으킨다.
낭인 코앞에 쓰러져 뒹굴고 있는 제자를 향해 기감을 뻗친다.
협제 제자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못한다.
낭인: 이놈. 뭔가 이상한데?
낭인 제자에게 다가간다.
손을 뻗어 제자의 등에 댄 다음, 체내의 기경팔맥을 면밀하게 살핀다.
낭인: 어쭈. 이것 봐라.
협제: 내 제자를 가지고 무얼 하는 게야!
협제 낭인에게 달려들지만, 낭인 남은 손으로 지팡이를 휘둘러 협제를 물리친다.
협제 또다시 다리의 끝까지 밀려나 휘청거린다.
협제: 빌어먹을….
낭인: 당최 이해가 안 가는군. 이놈의 혈도가 왜 이 모양이 됐지? 음기로 다스려야 할 기맥에는 어쭙잖은 양기가 들어차 있고. 역행해야 온전해질 내력의 흐름은 강제로 뒤집혀 순행의 경로를 따라 주천하고 있다. 어떤 놈이 이런 고약한 짓거리를? (협제를 바라본다) …그런 거였군.
낭인 제자의 등에 점혈법을 시전한다.
손가락으로 가압한 뒤 손바닥으로 치니 제자 나가떨어진다.
협제: 천인공노할! 얘야. 괜찮으냐? 이 스승이 당장 구하러 가마.
낭인: 얼추 됐다. 눈을 떠보아라.
제자: 푸학! 콜록콜록.
협제: 제자야!
낭인: 이제 숨통이 좀 트였지?
제자: 호흡이 너무나 편하다. 이런 상쾌한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낭인: 뒤엉켜 있던 혈맥을 본래의 상태로 풀어두었다. 막혀 있던 기운이 흐름을 되찾았으니 호흡은 물론이고 활력 자체가 판이하게 달라졌을 게다.
제자: 다릅니다. 확실하게.
낭인: 눈을 감고 하단전에 기감을 집중해보아라. 그 안에 깃들기 시작하는 내력이 느껴지느냐?
제자: 느껴집니다. 명징하게!
협제: 속지 마라. 마두(魔頭)의 사술로 얻은 공력은 겉보기에 그럴듯하나 필연적으로 너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당장 이쪽으로 오너라.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에 너의 단전을 파훼해야겠다.
제자: 단전을 파훼한다니요? 그럼 전 또다시 현명신장의 음독에 저항할 수 없게 될 텐데요?
협제: 사이한 내공에 침식되느니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백번 낫다.
제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협제: 지금 이 스승의 말을 의심하는 게냐?
제자: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사부님. 저는 억울한 거예요.
협제: 뭐?
제자: 어차피 제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선에게 가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비록 의선을 만나 뵙진 못했으나 이 제자. 드디어 천 자루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정해진 길목에선 벗어났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목표하던 지점에 정확히 이르렀으니 우리의 본래 목적은 이뤄졌다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협제: 귀를 의심하게 되는구나. 내가 지금 네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
제자: 청력에는 문제없으시잖습니까.
협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말대꾸를…!
제자: 사부님. 불초제자 지금껏 스승님께 폐만 끼치며 살아왔습니다. 저만 아니었으면. 못난 제자가 구차한 목숨 부지하고자 내력을 축내지만 않았더라면 사부님께선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에 오르고도 남으셨겠지요. 제가 느낄 죄책감을 짐작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소생이 느낄 비참함을. 비루하게 목숨을 구걸하며 매일을 연명하는 이 저의 참담한 심정을 사부님께서는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알고 계시잖습니까! 누구보다 제 마음을 잘 헤아리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제 단전을 부수겠다고요? 육신이 얼었다 녹았다 쪼개지는 극통 속에서 도로 허우적거리라고요? 사부님. 저한테 어찌 그런 잔인한 말씀을 하십니까?
낭인: 저런. 쯧쯧.
협제: 이놈! 느릴지언정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걸으라 내 그리 가르쳤거늘. 방문좌도의 심법으로 쌓아 올린 공력은 모래 위의 성과 같다는 걸 모르느냐? 하물며 마도의 심법은 어떠하겠느냐? 네가 지금 느끼고 있을 충만감. 상쾌함! 그건 단지 일시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거기에 취해버리면 너의 심기체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말 것이야.
제자: 단전을 부수면 그 심기체란 게 좀 나아지고요?
협제: 난 널 지키려는 거다. 제자를 구하려는 스승의 마음을 너는 왜 보려 하지 않는 게냐?
낭인: 지킨다? 구한다고? 글쎄올시다.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소만.
협제: 미간이 꿰뚫리고 싶지 않다면 네놈은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
낭인: 참말이라고 맹세할 수 있소? 제자를 위한다는 그 말.
제자: 선생.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협제: 삿된 언변이니라. 당장 귀와 입을 닫아라. 듣지도 말고 묻지도 마!
낭인: 이상하지 않느냐? 너의 스승. 협제가 그토록 오랜 세월 광극진기(光極眞氣)의 공력을 네게 전이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넌 계속 내상을 앓아왔다. 그런데 오늘. 이 내가 단 한 번 너의 혈맥을 만졌을 뿐인데 너의 속병은 상당한 차도를 보이고 있어.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협제: 우습지도 않다. 그런 조잡한 고자질이 내 제자에게 통할 성싶으냐?
제자: 잠깐.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제자 낭인의 말을 곱씹더니, 이윽고 전율한다.
제자: 사부님. 지금까지 날 가지고 무얼 했던 겁니까?
협제: 마두가 지껄이는 개소리일 뿐이다. 휘둘리면 안 된다.
제자: 내 병환을 낫지 못하게 방해하고. 아니. 오히려 악화시켜온 건가? 음기로 다스려야 할 상처에 억지로 양기를 불어넣어 가면서?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이 일어났던 일도 전부 그 때문이었나?
협제: 이놈!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해!
제자: 왜?
협제: 나중에 모두 설명해주마.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니다.
제자: 나를 그 괴로움 속에 빠뜨린 이유가 뭐지? 협제의 제자가 쓸모없는 버러지라는 멸시를 받을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전신에 휘몰아칠 때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에 벌벌 떨었어.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겪어온 모든 고초. 그것을 다름 아닌 사부님이 만들어냈다고? 사부님께선 다른 누구도 아닌 협제이시다. 암막한 세상에 광휘를 밝히신 분. 정의가 사라진 천하에 새로운 협의 깃발을 세우신 분. 그런 위대한 분이 제자에게만큼은 둘도 없는 원수였다니. 어째서? 사부님은 이 나를 왜 그렇게 핍박하신 걸까?
낭인: 극마지체(極魔之體).
제자: 극마지체?
낭인: 넌 날 때부터 마의 씨앗이었다. 현명신장이니 뭐니 하는 것에 당한 게 아니란 말이다. 설마 했더니 여태껏 그걸 몰랐었구나.
협제: 마두. 네놈의 혀를 뽑아버려야 허튼소리를 멈추겠구나!
협제 다리 중앙의 제자를 제친 후 낭인에게 달려든다.
낭인 지팡이에서 서슬 퍼런 검신(劍身)을 뽑아 협제에게 휘두른다.
협제 낭인의 검격을 받고 다리 밖으로 크게 밀려난다.
낭인: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광극진기의 내공을 발하지 않는 한. 귀하는 지금의 내게 결코 대적할 수 없소.
협제: 내 검법이 통하지 않다니 대체…. (선혈을 토한다).
제자: 사부님!
낭인: 목숨을 끊진 않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
제자: 사부님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낭인: 벌을 내렸다.
제자: 벌이요?
낭인: 널 대신해서.
제자: 당치않은…!
낭인: 아이야.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스승이 존재한다. 제자를 구원하지 못하는 스승과 제자를 구원하지 않는 스승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무능력하여 제자가 가진 잠재력을 꽃피울 역량이 부족하다. 그에겐 스승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제자: 제자를 구원하지 못한 스승. 바로 나의 사부님.
낭인: 후자의 경우. 즉 제자를 구원하지 않는 스승은 더욱 심각하다. 그는 스승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것이다. 인륜을 거스른 그에겐 스승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제자: 제자를 구원하지 않는 스승. 바로 나의.
낭인: 협제. 그는 스승의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승 노릇을 했다. 실로 괘씸하지 않느냐?
제자: 그래서 벌을 내리셨다고요?
낭인: 그러하다.
제자: 어째서요? 무얼 위해?
낭인: 너를 내 품에 거두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제자: 예?!
낭인: 느끼고 있지 않느냐?
제자: 뭘 말입니까?
낭인: 내가 너와 같다는 것을 말이다.
제자 움찔한다.
낭인: 내 말이 틀렸느냐?
제자: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낭인: 나도 안다. 네가 느꼈을 모멸감. 세상에 홀로 던져진 듯한 외로움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함. 살아남기 위해 빈약한 육신을 움츠리고. 타인의 호의에 기생해가며 매일을 살아내야 하는 무참한 기분. 희망은 숨 쉬듯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기를 멈추지는 않는다. 강한 나. 모두의 앞에 서는 나. 모두의 위에 서는 나. 그러나 상상의 나래는 끝내 꺾이기 마련이고 날 기다리는 건 결국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뿐.
제자: 그 아픔. 굴욕감. 선생께선 대관절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낭인: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이 짧은 외나무다리조차 자유롭게 거닐지 못하는 불구자가 바로 나다. 네가 느낀 설움을 나라고 어찌 겪어보지 않았겠느냐.
제자: 내 사부님, 협제를 쓰러뜨린 선생이십니다. 누가 감히 선생을 모욕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낭인: 내가 태어날 적부터 고수였는 줄 아는구나.
제자: 하면요?
낭인: 나는 그리 강한 무인은 아니었다. 무림맹에 있었을 적엔 말이지.
제자: 무림맹? 선생께서는 정파인이셨습니까? 헌데 어찌 지금은 마교에 투신하신 겁니까?
낭인: 다리가 부러졌다.
제자: 어쩐 일로요?
낭인: 여느 날과 같았다. 당시 나는 맹주 직속 무력대의 부대주였어. 대원들을 훈련시킨 뒤 하루 일과를 정리하려는 참에 연무장이 뒤숭숭해지더구나. 서둘러 현장에 가보니 스스로를 협객이라 칭하는 어느 젊은이가 치기 어린 패악질을 부리고 있었다. 강호에 나와 백인비무행(百人比武行)을 하고 있다던 그는 맹의 무사들에게 닥치는 대로 시비를 걸었지.
제자: 패악질을 부리는 협객이라. 그래서 그자와 승부를 벌이셨던 겁니까?
낭인: 쉽게 돌려보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허나 그자는 예상외로 위력적인 검법을 구사했고 손속에 자비가 없더구나. 나를 때려눕힌 것에 만족하지 못한 듯 그는 나의 두 무릎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버렸다. 그리고 나의 양 발꿈치마저 베었지.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그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짓고 있던 비릿한 웃음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제자: 몹쓸 작자로군요.
낭인: 내가 아는 고수 중에 단연.
제자: 그 이후엔 어떻게 됐습니까? 맹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었겠죠?
낭인: 그들의 입장에서 가장 적절한 조처를 취했지. 그런 일이 있은 후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나는 맹에서 쫓겨났다. 금전은커녕 은전 한 푼 받지 못한 채로 말이야.
제자: 설마요!
낭인: 구파일방을 넘어 정파무림 전체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이 아니냐. 제대로 된 보상 따위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살아갈 길 하나 나서서 마련해주지 않더구나. 설마하니 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비무에 임한 부대주를 그런 식으로 내팽개칠 줄 나는 알지 못했다.
제자: 씹어먹을 놈들. 그 뒤에는요? 생활은 어찌 이어가신 겁니까?
낭인: 불구의 몸으로 주루에서 술을 날랐다. 객잔 앞에 누워 버려진 음식을 구걸했고 유곽을 돌아다니며 동냥을 했다. 동전 한 닢을 얻기 위해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다. 맹의 무사로 있던 시절에는 결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 꼬박 십 년을 그렇게 보냈다. 한때 무림맹의 부대주였던 나는 완전한 거렁뱅이가 되었다.
제자: 말도 안 됩니다. 이럴 수는 없어요. 그게 무슨 정파이고 무림맹이란 말입니까!
낭인: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알게 되었다.
제자: 무엇을요?
낭인: 나의 일생을 수렁으로 몰아넣은 사내. 그가 협제라는 별호를 얻었다는 소식을.
낭인에게서 음산한 기운이 분출된다.
낭인: 그런 날이 있지 않느냐. 숨만 쉬어도 업신여김을 받는, 불행이 몰아닥치는 하루가. 내겐 그날이 바로 그러했다. 단지 거리를 나돌기만 했을 뿐인데 세상의 온갖 괄시가 날 짓누르더구나. 녹슨 바퀴는 유달리 삐걱거리고 노상을 오가는 사람의 수는 평소의 배는 되었다. 난 언제나처럼 객잔에 비럭질을 하러 다리를 건넜다. 다섯 명을 마주쳤고 다섯 명 전부에게서 욕지거리를 들었지. 하지만 그건 불운의 시작에 불과했다. 실컷 욕을 얻어먹고 비참한 기분이 된 나는 드디어 객잔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다. 낡은 죽립을 머리에 쓴 채로. 생채기로 가득 찬 검집을 패용한 채로 객잔 한가운데 앉아. 유유자적 술을 마시고 있는 그를. 수많은 사람들의 흠숭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며 점잔을 빼고 있는 위군자(僞君子), 협제를.
제자: 사부님을.
낭인: 서둘러 객잔을 빠져나왔고 그곳에서 가능한 한 멀리 벗어나려 했다. 좀 전에 건너온 좁은 다리에 이르자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턱을 오르고 다리를 건너려 하는데 아니나다를까 건너편의 행인이 벌써부터 눈알을 부라리며 내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와중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비켜서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면으로부터 난생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여라. 저 새끼를 죽여버려라. 다리 밑으로 빠뜨린 다음 거센 물살에 휩쓸려 뒈지게 만들어라.
제자 움찔한다.
제자: 내면의 목소리…라니요?
낭인: 두려운 동시에 그 무엇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단 한마디 말로 백 명의 무인을 부리던 무림맹의 부대주. 바로 과거의 내 음성이었지. 손이 덜덜 떨려왔으나 나 자신의 망령이 내린 지시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바퀴를 끌었다. 행인에게 근접해가는 내내 비루한 모습을 유지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역시나 그자는 나를 스쳐 지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 입 밖으로 뭐라 구시렁거리더구나. 바퀴를 끌던 손을 뻗어 그자의 옷깃을 붙잡았다. 굳어버린 두 다리에 비해 오랫동안 단련된 팔뚝은 너무나도 쉽게 행인을 들어 올렸다. 욕지거리를 내뱉던 행인의 입에서는 순식간에 비명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제자: 그렇게 죽였단 말입니까? 무공도 모르는 양민을?
낭인: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내면의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점점 더 많은 필부들을 다리 밑으로 추락시키라 명했다. 좁은 다리는 나의 사냥터가 되었다. 나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닥치는 대로 행인들을 집어 던졌고 밀쳤고 그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내 옷깃을 스칠 때까지만 해도 나를 욕하던 이들은 다리 밑으로 내동댕이를 쳐지는 순간 나를 보며 두 손바닥을 비볐다. 살려달라고. 제발 놔달라고.
제자: 통쾌하셨습니까?
낭인: 통쾌했다. 허나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목소리가 내게 움직임을 명했다. 가라. 서쪽으로. 대륙을 가로질러 땅이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십만대산(十萬大山)으로.
제자: 십만대산. 천하의 서쪽 끝에 자리한 마교의 본거지.
낭인: 갖은 고생을 한 끝에 그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조우한 것이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나의 동지들을. 빛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어둠에 의탁한 자들을.
제자: 마교의 교도들을. 선생과 같은. 그리고 나와 같은 처지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마인(魔人)들을.
그때 협제 자리에서 일어선다.
협제: 갑자기 웬 놈이 튀어나왔나 했더니. 그랬군. 일이 그렇게 흘러갔던 건가?
제자: 사부님.
협제: 정신머리마저 그리 구부러진 걸 보아하니. 두 다리만 요절난 게 영 아쉬웠나 보지? 아서라. 마도의 길목에 들어선 건 다름 아닌 네놈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 책임을 내게 떠넘기다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낭인: 내가 선택한 길이 맞소. 허나 어찌하여 내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한때 백도무림(白道武林)에 몸담았던 내가 왜 마교에 투신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초래한 장본인인 귀하는 여전히 들여다보려 하질 않는군.
협제: 뭣 하러 그런 수고를 들여야 하지? (제자를 향해) 슬슬 이리 오너라. 마두를 베어 없앤 뒤 다리를 건너자. 함께 황실로 가자. 마교의 실체를 파악한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구나. 시급히 황군의 협력을 얻어 사악한 무리를 토벌해야겠다.
제자 다리의 가운데, 무대의 안쪽으로 이동해 정면을 바라본다.
그는 협제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
협제: 무얼 하는 게냐. 스승의 명을 받잡지 않고!
낭인: 귀하는 이 다리를 건널 수 없소. 이십 년 넘게 갈아온 칼날로. 세월의 흐름 동안 켜켜이 쌓인 증오로 이 몸이 직접 귀하를 막아설 테니.
협제: 막아서겠다? 하하하. 하하. 이봐. 내 충고 하나 하지. 네놈의 분수를 아는 게 좋을 것이다. 병신은 병신답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때 가장 안전한 법이야.
낭인: 처박혀 있었소. 오랫동안 얌전하게. 신물이 나도록 말이지. (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한다) 허나 이젠 아니오. 숨지 않겠소. 침묵하지 않겠소. 순응하거나 체념하지도 않겠소. 비난에 위축되지도. 울분을 속으로 삼키지도. 부당함을 잠자코 인내하지도 않겠소. 협제여. 나는 칼을 휘두르겠소. 내 검법은 꽤나 날카로울 테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낭인에게서 극렬한 마의 기운이 분출된다.
협제 당황하고는 광극진기의 내공을 혈맥에 빠르게 주천시킨다.
협제: 이토록 광폭한 내공이라니. 네놈. 단순한 호법이 아닌 게로군?
낭인: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을 적 본좌(本座)는 모두에게 괄시받던 약자에 불과했지. 허나 마도를 택한 오늘날 세상에서 잊혀졌던 불구 한 명은 무림맹주에 대적하는 어엿한 마인이 되었으니….
협제: 당장 이곳을 돌파한다. 제자야. 내가 이 자를 막아서는 동안 넌 뒤로 물러나 있거라. 어서 이쪽으로 건너와!
제자 움직이지 않는다.
협제: 제기랄. 쓸모없는 짐 덩어리 같으니라고!
낭인: 발버둥쳐라. 발악해보아라! 신교의 제7대 교주. 철륜마신(鐵輪魔神) 무명은 무림맹주이자 협제의 이름을 가진 위선자의 도하(渡河)를 기필코 저지할 것이다!
협제: 옳거니, 네놈이 바로 교주였구나!
낭인의 극마진기와 협제의 광극진기가 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검격을 주고받는 그들 사이에 팽팽한 대치 상태가 이어진다.
낭인과 협제의 검이 버티지 못하고 부서진다.
협제의 절묘한 일격에 낭인은 휠체어에서 나가떨어진다.
협제 기회를 틈타 낭인에게 달려들지만 낭인 장법(掌法)으로 맞선다.
가부좌를 틀며 양 손바닥을 맞댄 두 고수의 대결은 이제 내공 싸움으로 흘러간다.
겉보기엔 아무런 움직임도 없지만 실상 가장 치열한 상태, 두 고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발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다.
협제: 마교의 세가 날로 강해지고 있음을 잘 알겠다. 이십 년 사이에 절정에 올랐다니 놀랍구나.
낭인: 겨우 이 정도로 놀랄 것 없다. 우리 마교에는 본좌와 같은 사연을 가진 불구들이 셀 수조차 없느니라. 천하만민의 천대와 차별에 지친 왕년의 무인들이.
협제: 그러하냐. (제자에게) 얘야.
제자에게 조명 비친다.
협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스승의 명을 받잡거라. 그리하면 내 너에게 일말의 책임도 묻지 않으마. 자. 내가 버티는 동안 마두의 목을 베어라. 정도를 벗어나는 과오만큼은 저질러서는 안 되니라. 이 승부에 결착을 짓는 건 너다!
낭인: 선택의 순간이다. 신의와 협의지심은 협제의 것이 아닌 적 없었고. 울분과 증오만은 언제나 너의 것이었다. 백도 위에는 늘 협제가 서 있었거늘 너의 길은 무엇이겠느냐?
정적.
제자 움직인다.
정면의 낭인과 협제를 지나친 그는 부러진 협제검의 파편을 집어 든다.
제자: 사부님.
협제: 잘 생각했다. 제자야!
제자 이제껏 날 살려둔 이유가 뭡니까?
협제: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제자: 극마지체. 언제 마의 싹을 틔울지 모르는 날 여태까지 왜 데리고 다녔냔 말입니다. 그냥 죽여버리는 게 가장 간단하고. 또 안전한 방법이었을 것을. 안 그렇습니까?
협제: 돌봐준 은혜를 모욕으로 되갚진 말거라. 경고한다.
제자: 그렇게 명성이 탐났습니까? 협제라는 칭호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던가요?
협제: 이놈! 내가 널 그리 가르쳤더냐!
제자: 나를 밑에 두고 교화하는 모습! 실로 강호인들이 귀감삼을 만했겠습니다. 극마지체의 후인을 데리고 다님으로써 사부님은 무림동도들이 공인하는 대협(大俠)의 반열에 오르신 게로군요. 이렇게 멍청할 수가. 십 년을 뒤치다꺼리하는 동안 그것 하나 눈치채지 못했다니!
낭인: 드디어 진실에 눈을 떴구나!
제자: 이것이 내 괴로움의 정체였구나! 사부님이 그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나는 어두워야 했던 거구나! 협제가 밝혀야 할 그림자로서 나는 존재했던 거구나! 선(善)의 위대한 승리를 장식하기 위한 악(惡)의 표상으로서 나는 협제의 발치에 붙어 있었던 거였어!
협제: 곡해도 이런 곡해가 없도다! 세상 어떤 스승이 제자를 제물로 삼아 자신의 평판을 높이려 한단 말이냐! 하등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는 당장 집어치워!
낭인: 협제는 이글거리는 광명이요. 너는 그 이면의 그림자다. 그러나 너의 어둠은 협제의 빛을 삼킬 만큼 너르고 깊다! 부숴라. 네 안에 남은 정의를! 파헤쳐라. 네가 밟았던 정도의 흙을! 질곡의 과거를 무너뜨리고 마(魔)로서 일어서라. 다름 아닌 너의 의지로 말이다!
협제: 주둥이를 다물지 않으면 그 혓바닥부터 씹어먹어 버리겠다!
제자 사부님! 불초제자 지금껏 사부님께 누만 끼쳐드렸지요. 허나 오늘. 이 제자 처음으로 사부님께 선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사부님께서 그토록 갈망해 마지않는 그 명성을. 대저 한 인간의 이름을 드높이는 방법 중 제일은 그의 죽음이라 하였으니…! (협제의 등 뒤로 이동한다)
협제: 이. 이놈. 멈춰라.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으나. 그만두란 말이다.
제자: 장차 거목이 될 마인의 칼날로 네게 불멸의 명예를 안겨주마. 죽어서 빛나거라. 너의 광휘를 삼켜가며 나는 살아 암막해지겠다. 세상 모든 마인들의 울분을 내 안의 어스름에 품어 보호하겠다. 오늘로서 받아들인다. 협제. 너는 선이요. 너는 협이다. 나를 악이라 부르고. 나를 마라고 불러라. 천마천세(天魔千歲). 암흑천하(暗黑天下). 협제를 제물로 삼으며 우리 마교는 지상에 우뚝 서리라!
협제: 무림맹에 일러 그럴싸한 직책을 내려주마. 군사(軍師)의 자리는 어떠하냐? 총관(總管)에 올라 호령하고 싶진 않으냐? 뭐든 들어줄 테니 원하는 걸 말해보란 말이다! 제길. 정녕 이 스승을 죽여야만 성이 풀리겠느냐?
낭인: 패배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니 그 굴욕감을 비로소 느끼겠구나. 흑암지옥에나 떨어져라. 더 이상 그 나불거리는 입으로 협객을 자청하지 말란 말이다.
제자 협제의 등을 깊숙이 찌른다.
협제 앉은 채로 꿈틀거리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춘다.
낭인 내공의 분출을 멈추고 협제의 상태를 진단한다.
낭인: 죽었군.
제자: 죽었습니다.
낭인: 어찌하여 네 스승이 아닌 나를 도왔느냐.
제자: 이제야 알겠습니다. 정의는 불의를 짓밟고 있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불의는 정의에 짓눌려 있기에 늘 웅크려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저 자신. 평생을 나무둥치의 벌레처럼 웅크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낭인: 본좌가 마교의 교주라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아차렸지?
제자: 교주님을 처음 마주한 순간 알려줬습니다. 목소리가요.
낭인: 네게도 마(魔)의 음성이 들린단 말이냐. 언제부터?
제자: 발작에 지쳐 쓰러진 어느 날. 경멸에서 해방되고자 죽음을 결심한 그때. 쌓이고 쌓인 분노가 폭발하며 느닷없이.
낭인: 네겐 무어라 명하더냐?
제자: 작은 협을 짓밟고 큰 협은 부수어라. 천하를 밝히는 광명을 마도의 어둠으로 뒤덮어라. 허나 애석하게도 그 명령에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어렸던 제겐 힘이 모자랐고. 목소리의 지시에 순종하려 할 때마다 누군가의 위력이 저의 내력을 강제로 증발시켰거든요.
낭인: 협제. 이 가증스러운 놈 말이구나.
제자: 억지로 빛의 공력을 주입해 기맥을 뒤흔드는 것이 어찌나 괴롭던지요.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저는 버텼습니다. 체력과 정신력은 매일 산산조각으로 깨어질지언정. 내면의 목소리만은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빛의 탐색으로부터 숨겨두었습니다.
낭인: 실로 영명한 기상이로다.
제자: 고단하고 숨 가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견뎌냈습니다. 선의 나무그늘 아래 마의 씨앗을 남몰래 심어둔 채. 그것이 발아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낭인: 그 씨앗이 마침내 싹을 틔웠구나.
제자: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낭인: 통쾌하냐?
제자: 통쾌합니다. 허나 아직 만족하진 못합니다.
낭인: 지금 너의 마는 네게 무어라 말하고 있느냐.
제자: 모조리 베어라. 협제의 시신을 회수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자들을. 막아서라. 다리를 건너 황실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정파의 모든 무인들을.
낭인: 협제의 죽음을 발견한 그들은 충격에 빠지겠지. 그리고 곧 다리를 건너려 할 것이다. 죽은 자에게조차 숨결을 불어 넣는 천하제일의 의원. 의선이 다리 건너편에 있는 줄로 믿고 있을 테니 말이다.
제자: 저와 함께 맹의 무사들을 치우시겠습니까?
낭인: (고개를 젓는다) 그건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일이다.
제자: ‘우리’라 하심은 설마?
낭인: 마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분노와 호승심으로 고양된 백만 마도정병들이 이곳에 집결할 것이다.
제자: 전쟁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겠군요.
낭인: 긴 싸움이 될 게다. 황실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에 따라 전황은 달라지겠지. 무림맹은 어떻게 해서든 황궁에 가닿고자 할 것이고 우리는 그 시도를 저지할 것이다. 정파인들의 도하를 방해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제자: 황실이 더 이상 우리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되겠습니다.
낭인: 황실은 이기는 쪽의 손을 들어준다. 맹이 아닌 우리의 존재감을 피력하기 위해서는 승부를 쉬이 맺어버리면 안 된다.
제자: 하면요?
낭인: 버텨야 한다.
제자: 버틴다.
낭인: 황실에 우리의 분노를 관철시킬 때까지. 우리들의 의지가 무림맹의 그것보다 강하다는 것을 그들이 마침내 깨달을 때까지. 사자의 힘줄보다 끈질기게. 그런 의미에서 듣거라.
제자: (무릎을 꿇는다) 하명하십시오. 교주님.
낭인: 이제부터 본좌를 교주가 아닌 사부라 불러라. 극마지체의 소유자이자 협제를 참한 네겐 그럴 자격이 있다. 본좌와 함께 싸우자.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거친 싸움터에서. 벼려진 검날을 서로 포개어가며 정파인들의 진격을 막아서는 거다. 그럴 준비가 되었느냐?
제자: 마인들의 곁에서. 그들과 함께 나란히 분연하게. 그 누구보다 위력적인 검을 휘두르겠습니다. 사부님.
낭인: 마도천하를 기대하게 되는구나.
낭인과 제자 무대 정면을 응시한다.
협제의 광명이 사라진 무대에 이제 두 마인의 어둠이 그 몸집을 부풀려 나간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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